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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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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묵난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7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춘하추동에 해당되는 네 가지 식물‚ 즉 매화[梅]‚ 난초[蘭]‚ 국화[菊]‚ 대나무[竹] 중 난초를 그린 그림이다. [개설] 매화는 이른 봄의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피우며 난초는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리고‚ 국화는 늦은 가을에 첫 추위를 이겨내며‚ 대나무는 겨울에도 푸른 잎을 계속 유지한다는 각 식물 특유의 장점을 군자(君子)‚ 즉 학식을 갖춘 사람의 인품에 비유한 것이다. [발달과정/역사] 사군자는 수묵화가 발달하기 전에는 형태의 윤곽을 선으로 먼저 그리고 그 안에 채색으로 메꾸는 구륵전채법으로 그려졌으나 북송시대부터는 사대부화가들에 의해서 먹이나 채색만을 사용하여 그리는 몰골법 묵화나 가느다란 먹선만 사용하는 백묘법으로 그려졌다. 사군자는 다른 소재에 비해 형태가 비교적 간단하여 서예의 기법을 이용하여 그릴 수 있으므로 서예와 동일시되기도 하였다. 즉 글씨가 그 사람의 인품을 반영한다는 원리의 연장으로 사군자도 화가의 인품을 반영한다고 믿어 문인화의 소재로 유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북송의 소식(蘇軾)과 문동(文同)아 묵죽(墨竹)을 문인화의 소재로 발달시키면서 시작된 사군자는 원나라 때에는 몽고족에게 나라를 잃었던 한족(漢族)의 지조와 저항을 표현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사군자라는 총칭이 생긴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략 명대 이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사대부들이 묵죽‚ 묵매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사대부는 물론 화원들도 대나무그림을 많이 그렸고‚ 또한 15‚16세기부터는 백자의 표면에도 나타났다. 사군자화의 기법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조선 후기에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가 전해지면서부터이며‚ 특히 남종문인화의 본격적인 유행으로 널리 그려지게 되었다. 추사 김정희의 묵란(墨蘭 : 不作蘭圖)과 묵죽은 그의 정신세계와 개성을 표현한 좋은 예이다. [인물] 계남(桂南)은 조선후기 삼척이 낳은 서화예술가로서 독특한 형식의 서법(書法)을 개척한 서예가이자 시인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조 후기의 대표적 서화가이던 소남(少南) 이희수(李喜秀)에게서 15세에서 20세까지 글씨를 배웠다. 계남은 어려서부터 백부님에게서 글을 배웠고 소남 사후에는 소남의 수제자였던 만재(晩齋) 홍락섭(?樂燮) 문하에서 학문과 글씨를 익혔다. 청주(?州)의 한학자인 성암(?菴) 박주순(朴?減)에게서 한학을 배우기도 하였다. 글씨는 조선중기의 명필이던 이광사(李匡師)‚ 조광진(曺光振)에서 이소남(李少南)‚ 심계남(沈桂南)으로 이어졌으며 조광진과 동시대인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독특한 추사체도 익혔다. 전(篆)·예(隸)·해(楷)·행(行)·초(草)에 걸쳐 그의 독창성은 계남체를 완성하고‚ 그의 스승인 소남(少南)이 시도한 사팔체법(四八體法)도 썼다. 196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많은 글씨와 글을 남겼다. [화제] 三月江南芳草綠 澹烟?雨結春陰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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