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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청화"수·복"자명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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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백자청화"수·복"자명항아리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8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가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궁전에서는 오로지 백자만을 사용했으므로 백자의 생산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민간에서는 대부분 분청사기를 사용?다. 조선시대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순백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내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백자청화(靑畵)는 유약을 입히기 전의 그릇 표면에 코발트계의 청색 안료로 그림을 그리고 순백자와 마찬가지로 잡물의 함유가 전혀 없는 순도 높은 장석계 유약을 그 위에 씌워서 번조한 것이다. 코발트계의 안료는 페르시아 일대에서 일찍이 개발하여 사용한 것으로 아라비아 상인의 손을 거쳐 중국을 통해 수입되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회회청(回回靑)이라고 불렀으며 대단히 귀하게 여겼다. 이 백자항아리는 구부(口部)가 직립(直立)되어 세워지고 동체(胴體)가 풍만하게 벌어져 구형(球形)을 이루고 있고‚ 낮은 굽다리를 지닌 아담한 모습의 항아리(壺)이다. 청화안료를 사용하여 동체(胴體) 두 곳에 각각 "수(壽)" "복(福)"자를 시문하였고 그 사이에 추상화된 초문(初聞)과 조문(鳥文)을 시문하였다. 유색(釉色)은 담청(?靑)을 머금은 백자유(白磁釉)가 시유되었으나‚ 부분적으로 유(釉)가 몰려 있다. 굽은 다리굽으로 굽안바닥에 모래를 받치고 번조하였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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