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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화 : 한산대첩(閑山?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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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기록화 : 한산대첩(閑山?捷)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8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1592년(선조 25)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선 70여 척을 격퇴하는 장면을 그린 기록화 <발달과정/역사>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제2차로 출동한 이순신의 수군은 6월 10일까지 사천(泗川)·당포(唐?)·당항포(唐項?)·율포해전(栗?涇戰)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계속 패전의 비보만이 들려왔다. 그렇게 되자 적은 해상에서도 다시 머리를 쳐들기 시작하여‚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적함이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떼를 지어 출몰하면서 육군과 호응하고 있다는 보고에 접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연락하여 재차 출동을 결정하였다. 이때 일본은 해상에서의 패전을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제1진은 70여 척을 거느리고 웅천(熊川) 방면에서 출동하고‚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의 제2진 40여 척과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도 많은 병선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7월 6일 이억기와 더불어 90척을 거느리고 좌수영을 출발‚ 노량(露梁)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전함 7척과 합세하였다.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고성 땅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대·중·소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접하고‚ 이튿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웠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板屋船) 5‚ 6척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급습‚ 이에 적 함선이 일시에 쫓아나오자 아군 함선은 거짓 후퇴를 하니 왜군은 득의양양하여 끝까지 쫓아왔다. 아군은 예정대로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미리 약속한 신호에 따라 모든 배가 일시에 북을 울리며 뱃길을 돌려 호각을 불면서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일제히 적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모든 지자총통(地字銃筒)·현자총통(?字銃筒)·승자총통(勝字銃筒)을 한꺼번에 쏘아 적함을 격파‚ 분소(焚燒)한 것만도 66척‚ 적의 목을 잘라 온 것이 86급(級)‚ 기타 물에 빠져죽고 찔려죽은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김형구(金亨球)가 그렸다. <제원> 가로 291cm‚ 세로 197cm * 학익진(鶴翼陣) : 학이 양 날개를 펴듯이 치는 진형(陣形).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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