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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수지(軍人須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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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군인수지(軍人須知)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8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독립운동가 박용만(朴容萬)이 쓴 군사 교범 <발달과정/역사> 박용만은 본관이 밀양(密陽)‚ 호는 우성(宇醒)‚ 강원도 철원(鐵原)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1906년 헤이스팅스대학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하고‚ 1909년 네브라스카에서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를 설립하였다. 1911년 신한민보(新韓民報) 주필이 되었고‚ 이듬해 네브라스카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아 하와이로 가서 대한인국민회의 신한국보(新韓國報)의 주필이 되었다. 또한 이 시기 그는 『국민개병설(國民皆兵說)』과 『군인수지(軍人須知)』라는 무장항쟁론에 관한 저서를 간행하여 그의 관심을 일반에 널리 확산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1911년부터 1912년 사이 국민회의 조직은 시베리아?만주지방 등에 16개의 지방회가 건설될 정도로 확산되었으며‚ 그의 임시정부조직론에 힘입어 대한인국민회는 해외 한인의 유일무이한 조직체로 성장하고 있었다. 1914년 대조선국민군단(?朝鮮國民軍團)을 창설하였으며‚ 17년 뉴욕에서 열린 약소국동맹회(弱小國同盟會)에 참석‚ 이듬해 《태평양시사(?平?時事)》를 창간하였다. 1919년 대조선독립단(?朝鮮獸立團)을 설립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이 되고‚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를 조직하였다. 1925년 하와이에서 열린 국제신문기자대회에 한국인 대표로 참석‚ 활약하였으며 1927년 국어교본을 편찬‚ 교포의 국어교육에 이바지하였다. 1928년 베이징[北京]에서 흉한의 습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수지(須知) : 마땅히 알아야 하는 일.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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