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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 허위(許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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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초상화 : 허위(許蔿)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8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조선시대 호국인물‚ 허위(許蔿) 초상화 <발달과정/역사> 조선(朝鮮) 후기의 의병장인 허위(1854.4.1 - 1908.9.27)의 초상화로‚ 전쟁기념관의 호국인물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전쟁기념관에서는 역대 전쟁?전란에 참전하여 국가를 구하였거나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하는 등 특별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귀감이 되는 호국 선열들을 선정하여 호국인물이라 하였고‚ 그 인물의 모습을 흉상‚ 초상화 등으로 제작하였다. 허위는 본관이 김해(金涇)‚ 호는 왕산(旺山)‚ 1854년 4월 1일 경상북도 선산(善山)에서 출생하였다. 1896년 이은찬(李殷瓚)?조동호(趙東鎬) 등과 의병을 일으켜 김천(金泉) 장날을 기하여 수백 명을 모집‚ 성주(星州)에 포진하였다. 그러나 협공하는 관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이은찬?조동호가 전사하자 다시 의병을 이끌고 진천(鎭川)에 이르렀을 때 고종으로부터 의병 해산령이 내려져 자진 해산하였다. 1899년 조<정의> 부름을 받아 영희전(永禧殿) 참봉?성균관(成均館) 박사 등에 임명되었다가 평리원수반판사(平理院首?判事)가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의 거의(擧義)명령을 받고 포천(抱川)?양주(楊州)?연천(漣川)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 수차례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양주(楊州)에서 의병대장들의 모임을 열고 이인영(李麟榮)을 원수부 13도의병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군사장(軍師長)이 되어 일거에 서울에 진입‚ 의병 2‚000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서 일본군과 대치‚ 격전을 벌였으나 패하여 퇴군하였다. 그 후 이완용(李完用)이 연천 진지로 사람을 보내 경상도 관찰사?내무대신 등의 관직으로 유인하려 하였으나 거절하고‚ 1908년 6월 11일 일본 헌병대의 습격을 받고 경기도 영평(永平)에서 체포되었다. 그 해 10월 옥중에서 사형당할 때 옥관이 유언의 유무를 물으니 “대의를 펴지 못하였는데 유언은 무엇에 쓰랴”하며 도리어 옥관을 꾸짖고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알루미늄 테두리를 한 합판 액자에 유화로 그린 초상화가 알루미늄판 배접으로 부착된 형태이며‚ 하단에 공적 설명문이 지사벽지에 실크 인쇄되어 있다. 허위의 얼굴 모습은 영정 및 관련자료 등을 바탕으로 하였고‚ 복장은 당시에 입었을 것으로 추정되던 도포를 표현하였다. <제원> 액자 규격 - 가로 : 45.5cm‚ 세로 : 76cm‚ 초상화 - 가로 : 45.5cm‚ 세로 : 45cm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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