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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상 : 유인석(柳麟錫)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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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흉상 : 유인석(柳麟錫) 의병장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8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조선시대 호국인물‚ 유인석(柳麟錫) 흉상 <발달과정/역사> 조선(朝鮮) 후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인 유인석의 흉상(胸像)으로‚ 전쟁기념관의 호국인물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전쟁기념관에서는 역대 전쟁?전란에 참전하여 국가를 구하였거나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하는 등 특별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귀감이 되는 호국 선열들을 선정하여 호국인물이라 하였고‚ 그 인물의 모습을 흉상‚ 초상화 등으로 제작하였다.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은 본관이 고흥(高興)‚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菴)이며‚ 1842년 강원도 춘성군 남면에서 출생하였다. 철종 때의 거유(巨儒) 화서(華西) 이항로(李?老)에게 글을 배우다가 1868년 그가 죽자‚ 중암(重菴) 김평묵(金平?)과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에 힘쓰는 한편‚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에도 직접 참여하였으며‚ 뒤에 그 자신도 제천(堤川)에서 강학(講學)하였다. 1876년(고종 13)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문하(門下)의 유생들을 이끌고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후 김홍집(金弘集)의 친일내각이 성립되자 의병을 일으켜 충주(忠州)?제천 등지에서 부패관리들을 죽였으나‚ 관군에게 패전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회인현(懷仁縣)에 은신 중 고종황제의 유지(諭旨)가 내려 한때 귀국하였다가‚ 1898년 다시 만주로 갔다. 1909년(융희 3)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3도의군도총재(十三道義軍都總裁)에 추대되어 이상설(李相卨) 등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침공을 기도하던 중 일본의 외교적 절충으로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었으나 뒤에 석방되었다. 1910년 국권피탈 뒤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봉천성 관전현(??省寬甸縣)에서 병사하였다. 이항로의 학통(學統)을 계승한 학자로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오석 좌대 위에 청동주물로 제작된 흉상이 설치된 형태이며‚ 유인석의 얼굴 모습은 영정‚ 문헌 등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복장은 당시 유인석이 입었던 구군복을 표현하였다. <제원> 흉상 높이 : 90cm‚ 오석 좌대 높이 : 140cm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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