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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상 : 신돌석(申乭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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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흉상 : 신돌석(申乭石)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8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조선시대 호국인물‚ 신돌석(申乭石) 흉상 <발달과정/역사> 조선(朝鮮) 후기의 의병장인 신돌석(申乭石)의 흉상(胸像)으로‚ 전쟁기념관의 호국인물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전쟁기념관에서는 역대 전쟁?전란에 참전하여 국가를 구하였거나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하는 등 특별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귀감이 되는 호국 선열들을 선정하여 호국인물이라 하였고‚ 그 인물의 모습을 흉상‚ 초상화 등으로 제작하였다. 신돌석(1876.11.3 - 1908.12.11)은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자는 순경(舜卿)이며‚ 본명은 태호(泰?)‚ 이명은 돌석(乭錫)이다. 경상북도 영덕(盈德)에서 출생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항일의식이 남달랐고 애국애족하는 마음이 강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조국의 운명이 위급해지자 무력으로 적과 싸울 것을 결심‚ 1906년 영해(寧涇)에서 의병 3백여 명을 일으켜 진군을 개시하였다. 울진군(蔚?郡) 평해면(平涇面)으로 가서 다시 3천여 명의 의병을 재편하고 여러 차례 일본군과 접전‚ 경상도?강원도 일대와 동해의 해안선을 따라 기습전으로 많은 적을 사살하는 등 가는 곳마다 큰 전과를 올렸으며 그만큼 명성도 높았다. 그러나 일본군의 병력도 증원되어 부득이 일월산(日月山)‚ 백암산(白岩山) 등지로 퇴각하면서도 일본군에게 요소요소에서 큰 타격을 입혔다. 1907년 12월 서울 공격을 목적으로 13도의 의병이 연합하기로 하고 양주에 모여들었을 때 신돌석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자‚ 의병을 이끌고 영해로 돌아와 항전을 계속하였다. 일본은 그를 체포할 목적으로 현상금을 걸었는데‚ 그 현상금을 탐낸 고종(?從) 김자성(金子聖)이 일본인에게 매수되어 그를 집으로 초대‚ 독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형제가 무참히 도끼로 찍어 죽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오석 좌대 위에 청동주물로 제작된 흉상이 설치된 형태이며‚ 신돌석의 얼굴 모습은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복장은 당시 신돌석이 입었던 평민복장을 표현하였다. <제원> 흉상 높이 : 90cm‚ 오석 좌대 높이 : 140cm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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