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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상 : 계백(階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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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흉상 : 계백(階伯)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8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삼국통일기 백제의 호국인물‚ 계백 흉상 <발달과정/역사> 삼국통일기 백제의 장군 계백의 흉상으로‚ 전쟁기념관 호국인물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호국인물은 역대 전쟁?전란에서 국가를 구하였거나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등 특별한 공훈을 남겨 후세의 귀감으로 선정된 이들인데‚ 전쟁기념관에서는 그 모습을 흉상‚ 초상화 등으로 제작하고 현양행사를 실시하여 왔다. 계백(?-660)의 출신과 생애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어 잘 알 수 없다. 다만 나당연합군이 침공하였을 때 달솔(達?; 제2품)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660년 당시 신라와 당은 백제를 먼저 멸한 뒤 고구려공격에 나서기로 하였다. 이러한 나당연합의 움직임에 대해 백제는 침공이 없을 것으로 여겨 대비하지 않아‚ 이들을 막아낼 전략적 요충에서 요격하지 못하였다. 계백은 죽기를 각오한 5‚000의 백제군을 이끌고 출전하면서‚ 자신의 처자를 모두 죽여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계백이 이끈 백제군은 황산(黃山) 벌에 이르러 세 개의 진영을 설치하고 5만의 신라군에 맞서 네 번이나 격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백제군은 관창 등의 장렬한 죽음에 사기가 오른 신라군의 총공격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계백은 병사들과 함께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 뒤 그의 호국정신을 기려 부여의 부산서원(?山書院)과 충곡서원(忠谷書院)에 배향되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흉상은 오석(烏石)의 좌대 위에 청동 주물로 제작되었으며‚ 계백의 얼굴은 부여 부산서원 소장의 표준영정을 바탕으로 하고‚ 복장은 당시의 미늘갑주로 표현하였다. <제원> 흉상 높이 : 90cm‚ 오석 좌대 높이 : 140cm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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