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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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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광복군 정복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8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1945년 2월에 제정된 광복군(光復軍)의 정복 <발달과정/역사> 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조직된 항일 군대이다. 1932년 이후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규모는 축소되었고 재정상 운영의 내용도 부실하였다. 더욱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각지에 흩어져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단체들은 충칭에 이전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일된 군사 활동과 외교활동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에 의하여 광복군이 조직되었는데‚ 광복군의 편성문제는 치장[江]에 있을 때부터 추진되어 오던 일로서‚ 군사특파단(軍事特?團)을 시안[西安]에 파견하는 한편‚ 광복군은 많은 경비가 필요한 군사조직이므로‚ 중국정부의 양해를 얻는 교섭을 벌였다. 중국정부는 공식적으로 광복군의 조직을 찬성하였지만‚ 한편으로 임시정부와 분열 상태에 있는 김원봉(金元鳳)계의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과 이미 합동하여 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이에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韓國光復軍總司令部)의 성립전례(成立典禮)를 가지고 우선적으로 광복군을 발족시켰다. 발족일을 전후하여 광복군 조직의 포고문과 그 밖의 선전 전단(傳單)이 배포되었고‚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는 관계법규를 정비하였으며‚ 총사령에는 이청천(李靑?)‚ 참모장에 이범석(李範?)이 취임하였다. 광복군의 편성은 임시정부에서 제정한 군사법규인 육군임시군제(陸軍臨時軍制)·육군임시군구제(陸軍臨時軍區制)·임시육군무관학교조례(臨時陸軍武官學校條例)·군사경위근무조례(軍事警衛勤務條例)·경위근무세칙(警衛勤務細則)·군무부임시편집위원부규정(軍務部臨時編輯?員部規定) 등 군사 활동의 기초를 마련하는 규정에 따랐다. 광복군은 3개의 지대(支隊)로 편성되었는데‚ 제1지대장에 이준식(李俊植)‚ 제2지대장 공진원(公震遠)‚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가 취임하였다. 또‚ 41년 1월에는 제5지대가 편성되어 나월환(羅月煥)이 통솔하였는데‚ 제5지대는 원래 전지(戰地) 공작원들이 많아 편성 후에도 주로 전후방 공작업무를 수행하였다. 소대·중대·대대·연대·여단(旅團)·사단(師團) 등의 6단(段)으로 기본적인 편성이 되었다. 또한 『광복(光復)』이라는 간행물을 발행하는 한편‚ 방송과 선전지를 전후방에 살포하여 애국 청년은 물론 일본군에 징병되어 온 한국청년을 유치하는 데에도 힘썼다. 1941년 11월에는 중국정부 군사위원회에서 광복군은 항일작전 기간 중에는 중국 군사위원회에 직속되어야 한다는 등 9개 항(項)의 조건을 내세워 지원을 제의해 왔으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가‚ 1941년 12윌 1일 수락선언문을 발표하여 군으로 창설되어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는 최후 순간까지 활동하였던 광복군은 일제의 패망이 점차 가까워지면서 다른 나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 또한 다른 나라와의 연합작전을 준비하면서 군복의 필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그러나 군복에 대한 조치가 소요(所要)를 따르지 못하여 다른 나라에 협동하는 대원의 경우 그 나라 군대의 복장을 그대로 착용하였다. 즉‚ 버마 · 인도전선에서 싸웠던 일부 광복군 요원들은 영국군 복장을 그대로 착용한 것이다. 이후 임시정부 군무부(軍務部)에서는 ‘군인의 각종 표지(標識)제정안’(1945년 1월 9일)과 ‘군인제복 양식(樣式)제정안’(1945년 2월 19일)을 제정‚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공포 시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광복군은 1945년 2월에 복식제식(服飾制式)이 정하여 질 때까지는 일정한 제복이 없이 중국식의 군복과 그 표지를 사용했으나‚ 복식제식이 정해진 후 독자적으로 광복군의 표지와 군복을 사용 착용케 되었다. 다만‚ 재정문제 등의 압박에 의해 복식제정이후에도 일부 사령부 요원만이 의식(儀式)이나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업무수행 시에만 착용하였을 뿐이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광복군 정복을 재현한 것으로 상의‚ 하의‚ 정모‚ 단화‚ 갈색 Y자형 밴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군수물자의 충당은 일단 해결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9일 대일선전(對日宣戰)을 정식으로 포고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분열상태에 있던 공산진영(共産陣營)과의 합류가 추진되어 1942년 7월에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었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副司令)에 취임하였다.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 있던 광복군은 1944년 8월에 임시정부로 이관되어 임시정부 통수부(統帥府)가 통할하게 되었다. 광복 직전에는 한미합동작전으로 국내 정진대(挺進隊)를 편성하여 진격하려다가 출동 시기가 임박하여 일제가 항복함으로써 실현되지 못하였으며‚ 해방 후 일부는 귀국하였다. 한편‚ 1940년 9월‚ 임정(臨政)의 국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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