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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험 답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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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과거시험 답안지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8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조선시대에 문과(文科)에서 작성된 과거시험 답안지 <발달과정/역사> 조선시대 과거에는 소과/문과/무과/잡과의 네 종류가 있었으며‚ 또한 정기시(定期試)와 부정기시(不定期試)의 구분이 있었다. 정기시에는 3년에 한번 열린 식년시 하나밖에 없었으나‚ 수시로 열린 부정기시에는 증광시(增廣試)/별시(別試)/알성시(謁聖試)/정시(庭試)/춘당대시(春塘臺試) 등이 있었다. 이 중 식년시와 증광시에는 소과/문과/무과/잡과가 모두 열렸으나‚ 별시/알성시/정시/춘당대시에는 문과와 무과만이 열렸다. 그리고 시험 시기는 식년시를 예로 들면 처음에는 모든 시험을 식년(子/卯/午/酉) 정월에서 5월 사이에 거행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향시인 초시에 합격한 자들이 서울에 올라와 복시에 응시하는 데 기간이 촉박하였고‚ 또 농번기에 수험생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농사에 방해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1472년(성종 3)에 초시를 식년 전해인 상식년(上式年) 가을에‚ 복시를 식년 봄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1437년(세종 19) 이후부터 과거시험의 장소를 1소(所)와 2소로 나누어 고시한 점이 특이하다. 이는 송대에 시관(試官)의 자제들을 따로 모아 시험한 별두장(別頭場)을 본뜬 것으로서‚ 1소시관의 자제나 친척 등의 상피인(相避人)을 2소로 보내고‚ 반대로 2소시관의 자제를 1소로 보냄으로써 과거의 공정을 기하는 동시에 부자가 한 시험장에서 실력을 다투는 비례(非禮)를 피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분소법(分所法)은 불편함도 적지 않았다. 즉‚ 다 같은 시험인데도 시험장소에 따라 시관이 다르고 시험문제가 달라서 수험생의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고시관은 여러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는 복수시관제(復數試官制)로서 상시관(上試官)/참시관(參試官) 수인과 감시관(監試官) 1인이 임명되었고‚ 전시의 경우에는 대독관(對讀官) 3~5인(3품 이하)‚ 독권관(讀卷官) 3인(2품 이상)이 임명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시관은 고려시대의 지공거와 같은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니라 상당히 제한된 소임만을 하게 되었다. 본 유물은 문과(文科)에 응시한 사람이 작성한 시험답안지이며‚ 표면에 붉은 색 채점 ‘차상(次上)’ 글자로 보아 급제하지는 않았고‚ 급제 차순위자였던 것 같다. <제원> 가로 : 176.2cm‚ 세로 : 68.5cm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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