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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몽혜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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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개몽혜두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8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1852(철종 3)∼1930. 한말의 의병대장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아명은 중만(仲萬). 자는 경기(敬器) 호는 습재(習齋). 이도재(李道裁)의 아들이다. 강원도 춘천 출신. <활동사항> 22세 때에 경기도 양평으로 가서 화서(華西) 이항로(李?老)의 제자인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 들어갔다. 화서학파가 춘추대의(春秋?義)의 명분론에 철저했듯이 그 역시 유인석과 더불어 춘추대의의 명분론에 입각한 존화양이론(尊華攘?論)을 철저히 따른 인물이다. 1876년 개항이 논의될 때 그의 동문 47명과 함께 상경하여 개항을 반대하는 상소(伏閤儒生斥?疏)를 올렸다. 1889년 유중교를 따라 충청북도 제천(長潭)으로 이사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의 강제로 배일감정이 폭발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투쟁이 일어날 때‚ 1896년 1월 20일 춘천 지역 의병들의 추대를 받아 의병대장직을 맡았다. 이후 전국에 격문을 보내어 나라의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 것이 의병의 책무임을 강조하고 이를 방해하는 관리들은 즉각 단죄할 것임을 선언하였다. 이때 정부에서 조인승(趙寅承)을 춘천관찰사 겸 선유사(宣諭使)로 파견하자 그를 가평 관아에서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이후 가평에서 서울에서 파견한 관군과 벌인 싸움에서 패하여 점차 전력이 약화되자 제천의 유인석 부대로 옮겨갔다. 그러나 1896년 6월 유인석이 제천전투에서 패하여 북쪽으로 옮겨가게 되자 이름과 호를 이의신(李宜愼)‚ 사정거사(?靖居士)로 바꾸고 황해도‚ 강원도로 거처를 옮겼다가‚ 1898년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이후 1900년 8월 의화단의 봉기를 계기로 귀국하여 제천에 머물렀으며 1907년 10월 자양영당(紫陽影堂)을 낙성하여 주희?송시열?이항로?유중교의 영정을 봉안하여 매년 음력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제례를 행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일제의 핍박이 심해지고 1911년 부인 유씨마저 죽자 다시 국외망명의 길을 떠나 만주의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930년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유해는 1934년 제천으로 옮겨져 자양영당 인근의 산기슭에 안장되었다. 이소응은 망명 당시 자양영당의 영정들을 소중하게 간직한 채 떠났는데‚ 그의 사후 유족들이 그 영정들을 지니고 귀국하여 자양영당에 다시 봉안하였다. 해방 직후인 1946년 자양영당에 그의 영정도 봉안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습재(習齋) 이소응(李昭應)이 후학을 위해 지은 책이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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