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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운학문대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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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청자운학문대접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9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철분이 극소량 들어 있는 태토위에 철문 1~3%의 장석유를 바르고 환원염으로 구워 유약 속의 철분이 청록색으로 변한 자기를 말하는데‚ 청자색을 진하게 하기 위해서는 유약을 여러 번 두껍게 발라야 한다. 대체로 훤원이 불충분하거나‚ 또는 불순물이 함유되거나 해서 유색이 황녹색이나 회녹색‚ 때로는 산화되어 황갈색을 띤 것도 청자로 부르고 있다. 다만 구리 성분의 산화에 의한 녹유는 청자에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 나라에서 청자의 발생은 10세기 후반에 고려의 중앙집권화 및 신지배층의 중국도자에 대한 수요에서 청자제작이 시작되었다. 즉‚ 10세 기 전반까지는 통일신라시대의 질그릇의 양상을 지니고 있어서 고려청자로의 진전은 고려의 중앙집권화가 추진되고 중국의 제도‚ 문물을 배우는 과정에서 중국의 비색청자를 열망하는 신지배층의 요구에 의해 제작이 이루어졌다. 예로 오월국이 북송에 의해 978년에 멸망하면서 월의 주요 장인들이 고려로 옴으로서 우리 도기 장인들이 청자제작기술을 배웠다. 9세기 혹은 10세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청자는 그후 거듭 발전을 하여 11세기 말까지는 청자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기형‚ 문양‚ 소성 수법 등이 고려적으로 세련되어 대규모 청자요로 발전하였다. 12세기 초에는 기명의 음‚양각으로 시문하던 자리 일부에만 상감이 보이다가 그후 기명의 전면에 확산되며 사실적인 문양이 양식화되기 시작하였다. 12세기 중엽에는 청자상감과 함께 청자철회‚ 청자동화등이 시작되었다.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에 걸쳐 무신집권과 몽고의 침입 등으로 고려의 지배세력이 문신귀족에서 무신귀족으로 바뀌면서 청자에 대한 취향과 경제‚사회의 변화에 따라 청자의 기형이 과장되거나 문양이 촘촘해지는 등의 경향을 보인다. 14세기에 들어서면서 원 지배하의 권문세족과 사대부세력의 등장으로 생활용 자기의 수요가 많아지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한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조선시대 분청사기로 이행된다. 특색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불교사회와 귀족문화를 배경에 두고 있는 고려청자는 비색과 유려한 선의 형태‚ 그리고 상감기법 및 문양을 특징으로 한다. 고려 이전의 기명이 의식용인데 반하여 합‚ 대접‚ 접시‚ 완‚ 술잔‚ 병‚ 주전자 등과 같은 실용적인 그릇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장식용의 도자도 제작되었는데 매병은 가장 고려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청자는 그 발달과정 및 기법상의 변화에 따라 순청자‚ 청자상감‚ 청자철회‚ 청자철채‚ 청자화금‚ 청자동화‚ 청자퇴화문‚ 청자연리문 등이 있다. <형태> 청자흑백상감연조문대접으로 자기 내면에 흑백으로 새무늬와 꽃이 상감되었다. 자기 내‚ 외면에 모두 빙렬상태가 보이고 굽바닥에는 모래받침 흔적이 보인다. 자기 외면에는 동체 상‚ 하단에 음각선으로 선이 상감되어 있다. 투명한 유약을 두텁게 시유하고 있다. 물레성형을 한 흔적이 보인다. <참고문헌> 1. 한국문화재사전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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