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이미지

直領袍

추천0 조회수 48 다운로드 수 0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直領袍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0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직령(直領)은 곧은깃 또는 곧은깃의 포(袍)를 말한다. 단령(團領)의 옷깃이 둥근 데 비해 옷깃이 곧게 생겼다는 데서 이름지어진 것인데‚ 곧은 깃이라 하여 전부 직령이라 표기하지는 않는다. 이재의『사례편람(四禮便覽)』에는 `直領卽俗制常服上衣 不能具渙衣者用之`라 하여 상복의 밑에 입는 옷으로 심의를 가지지 못한 자가 그 대신에 착용하는 옷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직령의 구체적인 용어를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고려 우왕 13년(1387) 6월에 명나라 제도에 의해 단행한 관복개정 때 처음 나타나며 이후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보면 심의 대신 착용한 점과 함께 조대(條帶)를 매었음도 알 수 있다. 조선 세종 때는 단령이 관복으로 승격된 후 직령은 천인(賤人)과 서민(庶民)의 옷으로 되었고‚ 양반츠은 세조 때 연거복으로 입기 시작해서 고종 21년(1884)과 32년(1895)의 사복개혁령에 의해 폐지되었으나‚ 순종은 세자 때 관례복으로 입었다. 또한 별감이나 향리들의 상복(常服)으로도 입어‚ 직령은 조선시대에 광범위하게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형태는 약간의 변화를 거친다. 초기에는 좁은 소매에 목파깃이고 무가 좁았다. 중기에는 소매가 넓어졌으며 옷깃은 칼깃으로 변하고‚ 무도 넓어져 무의 윗쪽을 뾰족하게 접어서 뒤로 젖혀 입었다. 후기에는 소매가 넓고 깃 궁둥이가 완만한 현대의 두루마기 깃이며 무는 완전히 뒤로 젖혀 뒷길에 무의 윗쪽을 꿰매어 고정시켰다. 고종 32년 이후 두루마기 형태로 만들어 입기도 했다. 본 유물은 1987년 3월 13-14일에 동래정씨(東萊鄭氏) 사암공파(?庵公?) 종중에서 선대(先代) 다섯분의 묘를 이장하던 중 출토된 의복들로‚ 그 중 세분(男 2인‚ 여 1인)의 묘에서 유물이 나왔다. (양우(良佑) : 1574-1647‚ 남양홍씨(南陽?氏) : 1584-1654 良佑의 始‚ 태제(泰齊) : 1612-1669 良佑의 子) 그러나 파묘(破墓)와 이장(移葬)이 끝난 후에 박물관팀이 현장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유물이 시신에 입혀진 수의(壽衣)였는지‚ 아니면 보공품(補空品)으로 넣은 것인지 정확한 판별이 어려우며‚ 또한 출토유물이 어느 묘에서 나왔는지의 구별에도 어려움이 있다. 남자의 유물로는 59점이 출토되었다. 모자류(帽子類)·단령·흉배 각 1점‚ 도포·천릭 각 2점‚ 창의 7점‚ 중치막 21점‚ 직령포 4점‚ 배자 1점‚ 답호류 3점‚ 적삼과 저고리 5점‚ 바지류 9점‚ 부채 1점 등이다. 여자의 유물은 23점인데 직령포 7점‚ 적리 7점‚ 치마 7점‚ 바지·속옷 각 1점이다. 동래정씨의 출토유물 중 중요한 것은 금사(金絲)로 된 쌍학흉배(雙鶴胸背)가 출토된 것인데‚ 이는 출토유물로서는 처음있는 일이었다. 이 직령포는 명주에 솜을 두고 만든 것으로 솜두께는 0.3cm정도이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