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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장동제침통(琉璃張銅製針筒) 급(及) 개(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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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유리장동제침통(琉璃張銅製針筒) 급(及) 개(蓋)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0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신라 석탑의 시원양식(?原樣式)을 보여주는 분황사(芬皇寺) 모전석탑(模塼石塔)은 선덕여왕(善德女?) 3년(634) 분황사 창건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3층만 남았지만 1989년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실시된 추정 복원도에 의해 7층이었을 가능성 보다는 9층이었던 것으로 결론이 모아졌다. 이들 사리구(舍利具)는 1915년 일인(日人)들에 의해 탑을 해체수리 할 때 발견된 2층탑신중앙 석함(石函)의 내부에 봉안(?安)되어 있었다. 석함은 자연석을 다듬어 석함 중앙에 네모진 구멍을 파고 뚜껑을 덮는 형태이다. 보통 목탑의 경우는 찰주(擦柱)의 아래에 네모진 구멍을 파고 사리를 봉안시키고 석탑의 경우는 탑신이나 지붕돌의 중간부위를 파고 사리를 넣는다. 그러나 모전석탑이나 전탑(塼塔)의 경우 목탑(木塔)이나 석탑과는 달리 탑자체에 사리구멍을 마련할 수 없음으로 이와 같이 별조(別造)된 석함으로 사리함을 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구 팔공산 송림사(松林寺)의 경우에는 거북모양을 하고 있는 특이한 형태의 석함이 발견된 바 있어 전탑의 사리배치 방식을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탑은 최초 건립후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수리복원을 하게 되는데 분황사탑의 경우 고려시대의 숭령통보가 발견되어 적어도 고려 때에 개탑(改塔)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리기로는 창건 당시에 봉안된 녹유사리병 파편과 고려시대 때의 은합(銀盒)이 있는데 은합의 안에서는 능직(綾織)으로 싸여진 5과(顆)의 사리가 발견되었다. 이밖에 다양한 공양품이 발견되었는데 용도를 알 수 없는 금동제 장식구와 바늘통‚ 가위‚ 향병‚ 금·은바늘‚ 조개껍데기 등이 있다. 현재 남아있는 분황사 사리구는 발견 당시의 것들 중 상당수가 분실되었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을 살펴보면 당시 발견된 목록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석함‚ 유리병‚ 은제합(능편과 사리5과)‚ 원반형수정‚ 원형조개껍대기‚ 패류(2)‚ 곡옥(18)‚ 도제장식품(6)‚ 수정옥(11)(구형 및 부정형)‚ 유리(1)‚ 금제귀걸이(1쌍)‚ 작은방울(3)‚ 유리제 장식구(4)‚ 금제실패형(동심원릉이 가득;한짝)‚ 유리제 침통(1)‚ 청동침통(1)‚ 금은바늘(각각2)‚ 동제가위(1)‚ 각종옥류(700여점)‚ 금동금구(약10편‚ 완형5점)‚ 연제품(練製品)(3)‚ 소형금구(6)‚ 금동제족집게(1)‚ 용도불명 청동제품(6)‚ 상평오수전(2)‚ 숭령통보(1)와 이 밖에 많은 금동 파편 등이 발견되었다.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출토된 사리구들이 내용면에서 주목되는 것은 같은 시기에 매납된 고분 출토유물과 그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다. 불탑은 여래의 무덤이므로 사리 봉안시 고분 매납 부장품과 같은 맥락에서 기타 장식구들이 넣었졌으리라 생각된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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