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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잔대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0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놋쇠로 만든 잔을 올려 놓는 대이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우리는 주변에서 푸르스름하게 녹이 낀 놋그릇이나 놋수저 같은 것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이 그릇이나 수저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살림살이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놋그릇의 재료는 성분과 비율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으나 넓은 의미로는 구리를 기본으로 하는 비철금속계의 합금이다. 따라서 놋그릇의 시원은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부터 청동제품이 순동제품보다 널리 쓰이게 되면서 석기로 만들어 쓰던 무기나 실용품이 청동으로 바뀌게 된다. 청동이 나타나기 전 순동은 북 이라크의 우바이드기(Ubaid: B.C.4500~4000)에 처음 쓰였으며‚ 가장 오랜 청동기(주석합금)는 B.C.3700년쯤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 찾아진다. 이러한 청동합금은 B.C.2000년쯤에 유럽에 전해지고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로 전해진 것은 B.C.1500~700년쯤이다. <유래및 발달과정> 우리나라는 B.C.1000년쯤에 처음으로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부터 청동야금술(冶金術)이 발달하기 시작하여 정교한 구리칼(銅劍)과 구리거울(銅鏡) 등을 남기고 있는데‚ 청동기를 만들어내던 활석 거푸집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 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는 금속의 재료나 기술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온다. 유석(鍮石)은 놋그릇의 재료가 되었으며‚ 이 합금은 특히 “신라동(新羅銅)”이라 불리면서 널리 중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청동가공 기술은 더욱 발달하게 되어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과 같은 세계적인 과학문화재를 탄생시켰다. 이어 고려시대에는 해동통보(涇東通寶)를 비롯한 여러 가지 화폐들이 주물기법으로 만들어졌으며 금속활자도 역시 해동통보와 같은 성분과 방법으로 만들어졌음이 과학 분석 결과 입증되고 있다. 놋그릇 역시 청동기시대 이래로 이어져 오는 우리겨레의 청동가공기술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놋그릇은 만드는 방법에 따라 주물유기와 방짜유기로 나뉘는데‚ 주물유기는 놋쇠를 녹여 해감모래거푸집에 녹은 쇳물을 부어 만드는 것이고‚ 방짜유기는 놋쇠를 녹여 바둑을 만든 다음 이 바둑을 불에 달구면서 망치나 메로 쳐서 모양을 잡아가며 만드는 것이다. 두 가지 놋그릇 가운데 방짜유기가 먼저 사용되었는데‚ 그 뒤 놋그릇이 대중화됨에 따라 일이 번거롭고 값비싼 방짜보다는 만들기 쉽고 한꺼번에 많은 양을 만들 수 있는 주물 방법을 썼다. 놋그릇 가운데 징‚ 꽹과리‚ 대야‚ 양푼‚ 식기‚ 수저 등은 방짜기법으로‚ 촛대‚ 향로‚ 화로는 주로 주물기법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 고유의 합금인 놋쇠로 만든 놋그릇이 언제부터 대중화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놋그릇은 양대납청성기(良?納?成器)라고 하며 방짜라고 많이 알려져 있다. 양대납청성기라는 이름은 평북 정주지방의 납청이라는 곳이 놋그릇의 본산지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인데 양대는 방짜라는 뜻의 사투리이다. 곧 납청에서 만든 방짜그릇(成器)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납청은 평안북도 정주군 마산면 청정동을 일컫는 말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놋그릇을 만드는데 필요한 소나무 숯을 쉽게 구할 수 있어 이 지역을 중심으로 방짜유기를 만들기 시작하여 놋그릇 만들기가 생업이 되었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놋그릇의 수요가 늘어나자손일이 많은 방짜 기법 대신 주물 기법으로 놋그릇을 만들게 되었다. 그 뒤 방짜유기의 수요는 줄어들게 되고 주물유기가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많이 사용되었으나 놋그릇이 일본으로 공출됨에 따라 많은 놋그릇 공장이 문을 닫게 되었다. 그 뒤에도 안성‚ 이리‚ 남원‚ 장흥‚ 순천‚ 함양‚ 김천‚ 봉화‚ 동래 등지에서 그 명맥이 이어져 왔으나 최근에는 스테인레스‚ 알루미늄‚ 플라스틱 그릇의 보급과 도자기 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이제 놋그릇의 자취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극히 일부지역에서만 놋그릇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놋그릇에서도 우리 선조들만의 독특한 합금기술과 과학슬기를 엿볼 수 있다. 즉 놋그릇에 사용되는 청동합금의 조성은 구리 78%에 주석 22%인데‚ 이 가장 질 좋은 합금을 방짜라 하고 질이 떨어지는 합금을 퉁짜라 한다. 오늘의 재료공학에서는 주석의 함유량이 20%가 넘으면 재료가 매우 취약하여 사용이 불가능한 합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놋그릇을 만들 때 이 합금조성이 정확하지 않으면 놋그릇을 만들 수 없다. 실제 유기의 산업화를 위해 현대 재료공학이론에 따른 권장비율로 놋그릇을 만들어 보았으나 놋쇠가 너무 찐득찐득하여 만들지 못했던 사례가 있다. 또한 금속이 가지고 있는 성질을 이미 잘 파악하여 그 성질을 적절히 이용하는 과학 슬기도 엿볼 수 있는데‚ 금속은 열을 가하면 열풀림 현상으로 연해지는 성질과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단단해지는 가공경화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금속의 성질을 적절히 이용한 것이 방짜기법이다. 이렇듯 삶의 현장에서 경험으로 일궈낸 합금비율과 금속속성에 대한 과학적 인식은 “안성맞춤”이라던가 “방짜유기가 주물유기보다 더 질기다”는 우리 선조의 옛말에 잘 담겨있다. 그러므로 “안성맞춤” 그 자체는 바로 우리 겨레가 자연의 속성을 삶과 잘 조화시키는 가운데 일구어낸 결과‚ 즉 구태여 서구의 사고에 비친 다면 “경험적 합리주의”의 소산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앞으로 이러한 실체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하여 우리 겨레과학에 대한 올바른 자리매김을 하여야 하겠다. 아울러 이 놋그릇은 납을 포함하고 있지 않아 음식을 담는 그릇으로 아주 전망이 좋을 뿐 아니라 그 독특한 합금기술을 첨단 소재개발 등에 활용한다면 다시 한번 안성맞춤의 명성이 세계로 뻗어갈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옛것도 첨단이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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