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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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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엽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0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놋쇠로 만든 옛날의 주화(鑄貨).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대개 둥글고 납작하며 가운데에 네모진 구멍이 뚫려 있다. <역사> 엽전의 시초는 중국의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반량전(半兩錢)을 주조하였는데 이것이 원형방공전(圓形方孔錢:엽전)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그 후 이러한 형태의 엽전은 청(?)나라의 광서통보(光緖通寶)에 이르기까지 중국 화폐의 기본형이 되었으며‚ 한국과 일본 등에서도 그 영향을 받아 거의 같은 형태의 엽전이 주조되었다. 621년 당(唐)나라에서 주조 ·발행된 개원통보(開元通寶)와 758년에 주조된 건원중보(乾元重寶)가 고려시대에 다량으로 유입되어 996년(성종 15) 이를 모방한 ‘건원통보’를 주조한 것이 한국 엽전의 시초라 할 수 있다. 1910년경 개성(開城) 부근의 고려고분에서 발견된 무문철전(無文鐵錢)과 뒷면에 ‘동국(東國)’이라 새겨진 ‘건원중보’는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중에서 무문철전은 방공원형(方孔圓形)의 형태를 갖추었을 뿐 조잡한 타조전(打造錢)으로 이는 당시 민간에서 만든 일종의 부장품(副葬品)으로 추측되며‚ 주조전(鑄造錢)인 ‘건원중보’는 관주전(官鑄錢)으로 여겨진다. 뒷면에 ‘東國’자를 넣은 것은 중국 엽전과의 구별을 위한 것으로 여겨지며‚ 후에 이 ‘東國’자는 앞면의 ‘乾元’자 대신으로 앞면에 새겨져 ‘동국중보(東國重寶)’라 하였다. 한편 목종(穆宗) 연간에는 중국의 ‘개원통보’를 모방한 고려주 ‘개원통보’가 만들어졌으며 이로부터 숙종(肅宗) 연간에 이르기까지 동국통보 ·삼한중보(三韓中寶) ·삼한통보 ·해동원보(涇東元寶) ·해동중보 ·해동통보 등 전명(錢名) 별로만 약 8종이 주조되었다. 그러나 이들 엽전이 유통화폐로서 널리 보급되지는 못하였고‚ 당시의 중요 화폐인 은병(銀甁) ·쇄은(碎銀) 등과 함께 대외무역의 결재수단으로 사용된 듯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국초(國初)에는 포전(布錢)과 저화(楮貨)가 백성들 간에 통용되고 있었으나 1423년(세종 5) 명(明)나라의 ‘만력통보(萬曆通寶)’에 준하여 ‘조선통보(朝鮮通寶)’를 주조하였다. 이것을 ‘해서(楷書) 조선통보’라 하며 1625년(인조 3)에 주조한 것을 ‘팔분서(八分書) 조선통보’라고 한다. 이들은 모두 소형전(小形錢)이며 대형전으로는 배면(背面)에 ‘호일전(戶一錢)’이라 새긴 것과‚ 무배자(無背字)인 해서전(楷書錢)과‚ 배면에 ‘十’자가 새겨진 팔분서전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시주화(試鑄貨)로 알려지고 있다. 1446년(세조 10)에는 전폐(箭幣)라고 하는 살촉 모양의 유엽전(柳葉錢)이라는 화폐가 발행되었으나 실물은 전하지 않으며 다만 길이 약 5.4 cm‚ 둘레 5.1 cm인 끝 쪽에는 ‘팔방통보(八方通寶)’라는 4자가 새겨져 있었고 화살촉으로 사용되었다는 점만이 알려져 있다. 1651년(효종 2)에는 ‘십전통보(十錢通寶)’가 주조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화폐유통을 적극 장려하기 위한 수단으로 엽전 50문(文)씩을 지니고 다닐 것을 의무화하였으며‚ 이것을 지니고 다니는 불편을 덜기 위하여 주조된 것으로 여겨지는 대형엽전이다. 그러나 이들 조선 전기의 엽전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널리 유통되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때까지 통용되던 포전과 저화만을 백성들이 중히 여기던 점과‚ 엽전을 만드는 원료인 구리의 부족으로 엽전을 다량으로 유통시키지 못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숙종‚영조 연간에 발행된 ‘상평통보(常平通寶)’는 한국 화폐사상 가장 오랫동안 유통된 엽전으로 그 종류를 세분하면 약 300종에 이른다고 한다. 이와 같이 종류가 많아진 이유는 당시 엽전의 주조가 국가에 의하여 한 곳에서만 주조된 것이 아니고 각 지방별로 또는 관아(官衙)별로 주조소가 있어 이들 주조소에서 발행하는 엽전의 질이 저하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엽전 뒷면에 주조소의 약호를 새기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상평통보를 크게 분류하면 ‘상평통보 무배자전(無背字錢)’ ‘상평통보 단자전(單字錢)’ ‘상평통보 당2전 하부 2자전(當二錢下部二字錢)’ ‘상평통보 당2전 하부 천자문순전(當二錢下部千字文順錢)’ ‘상평통보 중형전(中型錢)’ ‘상평통보 당1전(當一錢)’ ‘상평통보 당5전’ ‘상평통보 당백전(當百錢)’ 등으로 구분된다. 조선 후기에는 ‘대동 1전(?東一錢)’ ·2전 ·3전 등이 주조되다가 마침내 신주화(新鑄貨)로 바뀌었다. <상평통보> 숙종(1678~1720)대는 우리나라 화폐의 발전에 있어 획기적인 시기를 이루게 되었다. 이 시기에 「상평통보」가 주조‚ 발행되어 우리나라 화폐사상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이처럼 상평통보가 조선시대 말기까지 약 2세기에 걸쳐 계속적인 통용력을 가지고 화폐의 일반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사회 경제적 배경 하에서 발행되었기 때문이다. 첫째 17세기 중엽부터 점차 국내외 교환 경제가 발달하기 시작하여 유통부문에 일반적인 교환수단의 재개가 필요하게 되었다. 둘째 인조~효종 연간에 있어서의 인위적인 동전 통용시도와 개성 등지를 비롯한 일부지방에 있어서의 계속적인 화폐유통으로 화폐의 기능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인식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셋째 임진왜란 이후 국토가 황폐화하고 농민이 이탈하여 토지 재정에 기반을 둔 국가재정이 궁핍해 졌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재정 지출은 계속 가중되어 갔으므로 이의 보완책이 간절하게 요청되었다. <참고문헌> 두산세계대백과 http://www.currency.co.kr/korea02_1.html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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