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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막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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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나막신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0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나무를 파서 만든‚ 진 땅에서 신는 신. 앞뒤에 높은 굽이 있음. 목리. <유래 및 발달과정> 나막신은 격지 또는 목극이라고도 하며 대부분 오동나무나 버드나무로 만든다. 이 나막신은 중국에서는 극(솔)이라 하였고‚ 한국에서는 목혜(木鞋)라 부르다가 조선 후기부터 나막신이라 하였는데 최남선(崔南善)은 `나무신`이 와전된 것이라 하였다. <오주연문 장전산고>에 나막신은 임진왜란 전에 생겼다고 한다. 나막신은 굽이 높아 비올 때는 좋으나 무겁고 활동적이지 못하여 말을 탈 때나 먼길을 갈 때는 신지 않았으며 말라 터지지 않도록 밀(꿀을 짜낸 찌거기를 끓여 만든 기름)을 녹여 겉에 칠해서 사용했다. 처음에는 편편한 나무바닥에 끈을 매어 발가락이나 발끝에 걸고 다녀 일본의 게다[下蝕]와 비슷하였으나‚ 이것이 차차 발달하여 다른 신 모양과 같아지고 다시 여러 가지 맵시를 내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경우 나막신은 대개 소나무와 오리나무(통나무)를 파서 신과 굽을 통째로 만들었는데 남자용은 좀 더 투박하게 여자용은 측면에 여러 가지 무늬를 그리거나 코를 맵시 있게 파서 만들었다. 또 굽 끝에는 중국의 극처럼 쇠로된 발을 붙여 마모를 막게 하였다. <진주 나막신쟁이 날> 나막신쟁이 날"이란 진주 지역에서만이 쓰는 절기로서 한겨울이 다가고 동지섣달 스무 이튿날을 말하는데‚ 겨울이 다 간 듯한 속에 마지막 제일 추운 날을 말한다. 이 나막신쟁이 날에는 정말로 가난이 서럽고 모진 매를 단돈 석냥과 바꾸어 맞다가 죽은 나막신쟁이의 애틋한 전설이 담겨 있다. 지금부터 수백년전 전 말띠고개 언덕에 마음이 착하기가 흥부보다도 곱고 사람됨이 유순한 나막신쟁이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살림이 구차하고 식구가 많아서 생활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가난도 못 따라 온다는 속담이 있지만 못사는 사람이 한 밑천 모아서 잘 살기 어려운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막신이 잘 팔리는 여름이 가고 눈이 오는 겨울철도 다 지나 입춘이 오려 하는데 나막신도 팔리지 않으니 하루 세끼가 아니라 한 끼의 입도 큰 걱정이었다. 하루는 장날이라 하나 별 신통한 수도 없어 돈 못 번 빈손으로 탈래탈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때 마침 성내에 사는 부자가 어떻게 잘못되어 관가에서 곤장 서른 대를 맞게 되었는데 대신 매 맞을 사람을 찾고 있었다 우연히 주막집 앞을 지나다가 이 말을 듣게 되었으니 끼니를 굶게 된 나막신쟁이는 귀가 번쩍 띄었다. "여보게 박생원‚ 성내 그 아무개 부자 있지 않나?" "어‚ 있고말고 그것이 어쨌다는 건가?" "허‚ 참 어떻게 된 셈인지 관가에서 매를 맞게 되었는데 미리 짜 놓았는지 대신 매맞을 사람이 나오면 대신 가서 매를 맞아도 된다네 그려‚" "여보게‚ 그럴 수 있나. 대신 매맞을 사람이 바보 아닌 다음에야 누가 공짜로 나서겠나?" "아닐세‚ 미리 돈주고 짜 놓은 것이라도 매도 살살 사려 때릴 뿐 아니라 곤장 서른 대를 대신 맞아 주면 돈 석냥을 주겠다네 그려." 이런 수작의 말이 오고가는 것을 듣고 있던 나막신쟁이는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들한테 달려가서‚ "여보소‚ 정말 대신 맞으면 돈을 석냥 주는거여?" 하고 캐어 물으니‚ "그거야 내가 돈 줄 사람이 아니니 잘 모르지만 오늘 저녁까지 관가 사람이 그런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소. 아무튼 부잣집에 가서 물어나 보소." 하는 말에힘을 얻어 성내에 들어가서 그 부잣집을 찾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대신 매맞을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나막신쟁이는 스스로 돈 석냥에 몸을 팔아 관가에 가서 매를 맞기로 했다. 물론 이 때에 그 부자집에서는 애처로이 생각하고 일찍 저녁을 먹여서 호출장을 대신 들려 관가로 보냈다. 평소에 제대로 먹지도 못한 나막신쟁이가 한 끼니를 잘 먹은들 피골이 상접하고 영양실조의 몸이 갑자기 회복될 수가 없었다. 부모와 아내‚ 자식을 굶기지 않으려 하는 일념에서 단돈 석냥과 곤장 서른 대와 바꾸고 보니 그만 나막신쟁이는 매에 못 이겨 넘어져 넋을 잃고 말았다. 한참만에 정신을 차린 나막신쟁이는 말띠고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만 매 맞은 후유증에 견디다 못해 죽고 말았다. 나막신쟁이가 죽자마자 이상하리만큼 겨울 날씨 치고는 매섭고 모질게 바람이 불고 추웠다. 집에 기다리던 가족들은 밤이 되어도 착실한 집주인이 돌아오지 아니하자 찾으러 나왔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나막신쟁이가 죽은 그날로부터 꼭 일 년이 되면서 매년 반드시 가장 추운 날이 되돌아오니 언제부터인가 이 날을 진주사람들은 나막신쟁이 날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 날이 바로 동지 스무 이튿날‚ 음력으로 제일 마지막 장날인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민속대사전 두산세계대백과사전 http://www.musenet.or.kr/collection/collection/109.htm http://www.hanwoolis.co.kr/~hosang/3-2-2/namagsin.htm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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