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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金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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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금관(金冠)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0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조선시대 문무백관이 조복(朝服)에 착용하던 관모(冠帽). 금관(金冠)은 원단(元旦)‚ 국경일‚ 대제례(?祭禮)‚ 조칙의 반포‚ 진표(進表)시에 백관의 조복(朝服)과 함께 착용한다. 이를 금관조복(金冠朝服)이라고 한다. 원래 이 관(冠)의 제도는 중국 명나라의 제도를 본 뜬 것으로 검은색 모에 둘레가 있어 앞면 둘레는 너비가 그다지 넓지 않으나 뒷면 둘레는 위로 치솟아 두 작은 각을 이루게 하였으며‚ 또한 앞면 둘레의 가운데부분에서부터 치켜올린 뒷면 둘레의 가운데 부분에 이르기까지 반월형의 면지(面紙)를 장식하였는데 이 면지에는 밑에서 꼭데기에 이르기까지 흑색사로 종선(縱線)을 베풀어 이를 양(梁)이라 하였다. 양의 수에 따라 품위(品位)의 상하를 구별하였는데‚《경국대전 經國?典》 예전 의장조(禮典 儀章條)에 의하면 1품관은 5량관‚ 2품관은 4량관‚ 3품관은 3량관‚ 4‚ 5‚ 6품관은 2량관‚ 7‚ 8‚ 9품관은 1량관으로서 이 제도는 《대전회통 ?典會通》에서도 동일하게 시행되었다. 그러나 고종이 명의 제도와 같은 황제에 올라 이등체강의 원칙을 고쳐 명의 제도와 일시 같아졌었다. 이후 1900년의 문관 대례복 제식을 구미식 관복으로 바꿔 금관도 조복과 함께 사라졌다. 금관의 모양은 원통형이며 관 전면의 머리둘레 부분과 후면 전체에 당초무늬를 하였으며‚ 여기에 이금(泥金)을 하고 나머지는 흑색이었다. 여기에 목잠(木箴)이라는 관을 가로지르는 비녀가 있어 그 목잠에도 이금을 칠하였는데 이에서 금관이라는 명칭이 얻게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조복과 함께 화려하게 꾸밈으로써 위의(威儀)를 갖도록 하였다. 양관에 있어 금관과 제관의 차이는‚ 제복에 있어서 제관은 경건의 뜻을 표시하여 당초모양문의 전면 소부분과 목잠의 구멍 둘레만을 금칠하고 그 외는 전부 흑색으로 칠하였다는 점이다. <참고문헌> 한국복식사연구 (유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75) 조선시대 궁중복식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81) 한국복식문화사전 (김영숙‚ 미술문화‚ 1998) 관모 연구 Ⅲ(강순제‚ 카톨릭대학교 생활과학연구논집 제16권‚ 1996) <사진자료> 조선시대 궁중복식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81‚ 10-12쪽) <기타참고> 금관제작방법(인간문화재‚ 예용해‚ 대원사‚ 1997‚ 399-400쪽) <유사관련용어> 양관(梁冠)‚ 제관(祭冠)‚ 금관조복(金冠朝服)‚ 조복(朝服)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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