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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포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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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도포끈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0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도포를 입을 때 허리에 매는 끈이다. <도포( 道袍)> 조선시대에 남자들이 통상 예복으로 입던 웃옷. 도포의 유래에 대하여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이덕무(李德懋)와 이규경(李圭景) 등은 승복(僧服)이 기원이라고 하였다. 도포에 관한 첫 기록은 《선조실록(宣祖實錄)》에 1607년(선조 40) 4월 문신 이홍망(李弘望)이 초록색 겹도포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고‚ 또 《효종실록(孝宗實錄)》에는 이를 뒷받침하여 도포가 임진왜란 이후부터 있었다고 하였으며‚ 《대동야승(?東野乘)》 <속잡록(續雜錄)>에는 광해군(光涇君) 때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弘立)이 초록색 도포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영조실록(英祖實錄)》에는 1736년(영조 12) 9월 세자의 돌을 맞아 청색 도포에 금사관(金絲冠)을 씌웠고‚ 영조가 승하하자 광직(廣織)과 공단 ·화화주(禾花紬)로 다홍색 도포 24벌을 지어 넣었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도포는 위로 왕족에서부터 문 ·무신에 이르기까지 널리 유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근세에 이르러 도포가 천예층(賤隸層)에까지 퍼지자 정약용(丁若鏞)이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이를 개탄하는 글을 쓴 것이 있다. 그러나 1884년 복제개혁 때 넓은 소매옷이 금지되자 도포도 사라졌지만‚ 민간에서는 최근까지도 봉제사(?祭祀) 등에 착용하는 일이 있었다. 도포는 깃이 곧아서 현대의 두루마기깃과 같으며 동정이 있다. 소매는 넓은 두리소매이고 섶과 무가 있으며 뒷길의 중심선이 진동선부터 틔어 있다. 그리고 뒷길에 한 폭의 전삼(展衫)을 덧붙여 뒷트임을 덮는데‚ 전삼이 바람에 펄럭이는 모양은 도포의 멋과 특징이 되어 다른 많은 웃옷[袍]들과 구별되는 점이다. 옷감은 명주 ·비단 ·공단 ·모시 ·생모시 ·베 ·광목 등이 사용되고‚ 색상은 초록색 ·청색 ·다홍색 ·미색 ·백색 등으로 다양하였다. 조선 후기인 영조 때는 겹도포도 있었지만 말기의 유물들은 모두 홑옷이다. 옛날에는 이것이 사대부와 유생의 상복(常服)인 한편 통상 예복도 되었다고 하나‚ 후에 다른 예복들이 모두 폐지되자 도포는 남자의 유일한 예장(禮裝)이 되었다. 이 옷은 원래 특권적인 복장이어서 서민들은 입지 못하였으나‚ 근세에 이 금기가 깨졌다. <참고문헌> http://kr.encycl.yahoo.com/final.html?id=48519+from=enc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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