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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자 귀얄문 대접(粉靑磁 귀얄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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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분청자 귀얄문 대접(粉靑磁 귀얄文 ??)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분청사기라는 이름은 제작 당시의 이름이 아니고 1930년대 고유섭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며 `백토분장(白土粉粧)한 회청색(灰靑色)의 사기(沙器)`라는 그릇 특징에서 유래하였다. 분청사기의 전성기는 세종(世宗 1418~1450)시대인데 백자와 고려 상감청자의 전통을 이은 소위 분청사기와 같은 종류는 모두 자기(磁器)로 보았다. 특히 백자만은 "백자(白磁(瓷))"‚ "백사기(白沙器)" 등의 이름을 붙였던 기록이 왕조실록에 남아 있는데 반해 분청사기를 특별히 지칭한 점을 찾을 수 없고 단지 "자기(磁器)"로 보았을 뿐이다. 이에 비해 옹기나 토기 종류는 "도기(陶器)"라 하여 구별하고 있다. 기형상 발은 접시의 몸통이 위쪽으로 더 발달한 반원통형의 형태로 뚜렷한 배통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기물의 형태가 밑면보다 윗면이 넓은 종류의 기물이다. 종류로는 사발‚ 대접‚ 탕기‚ 종지‚ 술잔‚ 뚝배기 등이 있다. 분청사기 대접의 기형은 14세기 고려시대 기형이 대체로 이어진다. 두텁고 둔탁하며 굵은 모래받침의 내만형 대접에서 차츰 기벽이 얇아지고 태도비짐받침으로 굽 주위 처리가 비교적 정제되어 경쾌해지면서 세종(世宗) 시대에 들어와서는 외반형(?反形)의 양감있는 대접이 현저히 증가한다. 주요 생산지를 보면 고려청자의 경우는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 백자는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이들 모두 국가의 강력한 규제와 보호를 받는 관요(官窯)의 성격을 띠었으나 분청사기만은 어느 일정한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고 130여 곳이 넘게 전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결국 분청사기는 토산공물의 하나로 중앙에 상납되게 되어 관사명(官司名)이 들어 있는 것이 많고 관사명이 새겨 있는 그릇은 왕실 및 관아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문양에서 보여지는 귀얄은 풀칠을 하는 거친 빗자루를 말하며 귀얄문은 분청사기를 제작할 때에 거친 빗자루에 백토로 만든 분장토를 묻혀 기물의 표면에 빗자국이 남도록 칠하여 태토와 백토의 붓자국을 조화시키는 방법이다. 대체로 포개서 구워 대량 생산한 막사기에 많이 있다. 박지‚ 음각‚ 철화 기법에는 기본적으로 귀얄을 사용하여 백토를 분장하며 귀얄 자국만 남는 순수한 귀얄 기법은 대개 분청사기의 쇠퇴 과정에서 많이 사용하였다. 이 분청자 귀얄문 대접은 외측면 저부를 칼로 깎은 후 측사면이 외반된 구연까지 사선으로 쭉 뻗는 기형이다. 굽은 거칠게 깎은 다리굽으로 접지면이 좁고 굽안바닥은 시유하지 않았다. 유색은 녹색이 도는 회청색이고 내측면 전체에 귀얄문을 시문하였다. 내면 중앙과 굽의 접지면에 내화토 비짐 받침을 6개씩 놓고 포개서 번조하였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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