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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행렬용 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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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김수환 추기경 행렬용 제의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김수환 추기경이 착용했던 것으로 성직자가 미사‚ 성사 집행‚ 행렬‚ 강복 등 모든 의식 때 교회 규정에 따라 입는 예복. <유래 및 발달과정/역사> ①성직자가 미사‚ 성사 집행‚ 행렬‚ 강복 등 모든 의식 때 교회 규정에 따라 입는 예복들을 총칭하는 말로‚ 사제가 경신례를 행할 때는 구약시대부터 특별한 예복을 입어 왔다. 이는 사제가 다른 사람과 구별되어야 하고‚ 일상생활을 떠나 제사의 거룩함과 위대함을 표현하고 존경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교의 제의는 초기 교회시대‚ 특히 박해시대에 사제나 평신도들이 입었던 옷에서 비롯되었는데‚ 사제에 대한 존경의 표시와 초기 교회를 상기시켜 주고 교회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계속 입게 되었다. 중세에 와서 제의의 가지 수가 정해지고 형태와 장식에 있어 쇄신이 일어났다. ② 사제가 미사를 집행할 때에 장백의 위에 입는 반수원형(半袖圓形)의 옷으로‚ 로마인의 옷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원래 남녀가 함께 입던 겨울 외투였으며 4세기에 로마 원로원의 제복이 되었고 귀족들의 집회에서 유행하였다. 후대에 일반인들의 옷은 변했으나 성직자들의 옷은 그대로 남아 미사 때 입게 된 것이다. 제의는 예수의 멍에를 상징하고 애덕을 표시한다. 보통 비단이나 벨벳 등의 고귀한 옷감으로 만들어지며 십자가 등 여러 상징으로 장식된다. <일반적 형태‚ 특징> 앞면길이 : 134.5cm‚ 등길이 : 426cm 물결무늬가 있는 홍색 합성섬유로 제작되었다. 행렬용이기 때문에 뒷면의 길이가 매우 길다. 민소매이며 목에서 어깨 아래에 이르는 끌레지망 부착되어 있다. 끌레지망의 뒷면에 길이가 긴 모자가 달려있다. <참고> 김수환(金壽煥) 추기경(1922-) 서울대교구장. 세례명은 스데파노. 본관은 광산(光山). 김동한(金東漢‚ 가오르) 신부의 아우. 경북 대구 남산동에서 김영석(金永錫‚ 요셉)과 서중하(徐仲?‚ 마르티나)의 6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조부 때부터인데‚ 조부인 김보현(金甫鉉‚ 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戊辰迫害) 때 충남 논산군 연산(連山)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조모인 강말손(?末孫)도 남편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임신한 몸이었으므로 석방되어 영석을 낳게 되었으며‚ 영석은 성장한 뒤 영남 지방으로 이주하여 옹기장사를 하다가 혼인한 뒤 대구에서 정착하였다. 김수환은 이후 부친을 따라 군위(軍威)로 이주‚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를 거쳐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에 입학했다. 1941년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한회 등을 통해 한국 교회를 국내외에 드러내는 데 많은 역할을 하여 교세를 확대시켰다. 한편 김 추기경은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며서 “교회는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는 인사말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의 원칙을 밝혔다. 동시에 가난하면서도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하여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 노동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고‚ 이후 정치 현실과 노동문제에 대한 강경 발언을 서슴치 않음으로써 대내외적으로 인권 옹호자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김 추기경의 사회 교리에 대한 의식으로 한국 천주교회는 제3공화국 이래 현재까지 정치권력에 의해 많은 고난과 희생을 받아 왔지만‚ 그 희생과 고난의 대가로 교회의 지위가 대내외적으로 크게 격상되었고‚ 2000년대 복음화를 위한 발판도 다지게 되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조오찌 대학(上智?學)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1944년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동경 남쪽 후시마(父島)에서 훈련을 받던 중 종전(終戰)을 맞고 조오찌대학에 복학했다. 그리고 1947년‚ 해방을 맞이한 조국으로 돌아와 성신대학(가톨릭 대학의 전신)에 편입‚ 4년 후인 1951년 9월 15일 대구에서 서품되었다. 김 추기경은 이후 1970년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 의장과 여러 분과 위원장‚ 주교 회의 의장과 여러 분과 위원장‚ 주교 회의 산하 여러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역임했으며‚ 국내외의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울러 그 동안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 시성 운동‚ 해외 선교 사업‚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행사‚ 서울 제44차 세계 성체 대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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