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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봉성체 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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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추)봉성체 가방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봉성체 의식에 사용될 성체‚ 작은 성합‚ 전례서‚ 수건‚ 성유‚ 영대 등을 넣어 운반하는 가방으로서 김수환 추기경이 사용했던 것. <유래 및 발달과정/역사> 봉성체 가방의 유래와 발달과정은 봉성체 의식의 유래와 발달과정과 괘를 같이 한다. 봉성체 의식의 유래 및 발달과정을 살펴 보면 아래와 같다. 봉성체는 주님의 이름으로 병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형제애로 돌보아 줌으로써 그리스도와 교회의 걱정과 사랑을 함께 나누기 위한 것이다. 성 유스티누스의 《제1호교론》(Apologia Ⅰ) 6장에서 부제들이 미사에 참여하지 못한 형제들에게 성찬 음식인 성체와 성혈을 가져다 주었다고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이미 2세기에 미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병자들에게 성체를 영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8세기 전까지 미사에 참여하지 못한 병자들에게 성체를 모셔 가 영해 주는 것은 사제나 부제가 행하였지만‚ 특히 부제의 주요한 임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시대에도 평신도들이 영성체하고 병자들에게 영성체를 시켜주는 권한을 부여받았음을 교부들의 여러 문헌이 증언하고 있다. 8세기 이후에는 칼 대제(Karl der Grosse)의 개혁을 시작으로 평신도가 성체를 영해 주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많은 문헌에서는 사제들이 병자들에게 성체를 영해 주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병자들에게 성체를 영해 주는 정규 집전자는 사제였고‚ 부제는 예외적인 집전자였다. 14∼15세기에 이르러서는 평신도들이 성체를 만지는 행위를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칼 대제의 개혁 이후 병자들의 영성체 예식은 여러가지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중세 초에는 세가지 주요한 예식이 있었다. 첫번째 형태는 병자에게 성체를 영해 주기 위해 그를 성당으로 데려가는 것이었고‚ 두번째 형태는 사제가 죽음에 임박한 사람의 집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었는데 이 미사를 위해서는 특별한 양식의 기도들이 만들어졌다. 세번째 형태는 성체가 보존되어 있는 감실에서 성체를 병자의 집으로 모셔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12세기까지 경우에 따라서는 한가지 양식으로만 영성체를 영해 주었는데‚ 일반적으로는 병자들에게 성체와 성혈 두가지 양식으로 영성체를 해주었다.그러나 이러한 두가지 양식의 영성체는 성혈 보존에 따르는 여러가지 어려움 때문에 12세기말부터는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만을 병자들에게 영성체해 주는 것으로 대체되면서 급격히 일반화되었다. <일반적 형태‚ 특징> 가로 14cm‚ 세로 14.6‚ 두께 4cm 본 소장품은 김수환 추기경이 사용했던 것으로 흑색 가죽으로 제작되었다. 방형의 본체에 목에 걸수 있는은 성장한 뒤 영남 지방으로 이주하여 옹기장사를 하다가 혼인한 뒤 대구에서 정착하였다. 김수환은 이후 부친을 따라 군위(軍威)로 이주‚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를 거쳐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에 입학했다. 1941년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조오찌 대학(上智?學)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1944년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동경 남쪽 후시마(父島)에서 훈련을 받던 중 종전(終戰)을 맞고 조오찌대학에 복학했다. 그리고 1947년‚ 해방을 맞이한 조국으로 돌아와 성신대학(가톨릭 대학의 전신)에 편입‚ 4년 후인 1951년 9월 15일 대구에서 서품되었다. 이후 1970년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 의장과 여러 분과 위원장‚ 주교 회의 의장과 여러 분과 위원장‚ 주교 회의 산하 여러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역임했으며‚ 국내외의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울러 그 동안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 시성 운동‚ 해외 선교 사업‚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행사‚ 서울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 등을 통해 한국 교회를 국내외에 드러내는 데 많은 역할을 하여 교세를 확대시켰다. 한편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면서 “교회는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는 인사말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의 원칙을 밝혔다. 동시에 가난하면서도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하여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 노동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고‚ 이후 정치 현실과 노동문제에 대한 강경 발언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대내외적으로 인권 옹호자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김 추기경의 사회 교리에 대한 의식으로 한국 천주교회는 제3공화국 이래 현재까지 정치권력에 의해 많은 고난과 희생을 받아 왔지만‚ 그 희생과 고난의 대가로 교회의 지위가 대내외적으로 크게 격상되었고‚ 2000년대 복음화를 위한 발판도 다지게 되었다. 긴 끈 부착되어 있으며‚ 안에 봉성체 의식에서 사용될 봉성체‚ 작은 성합‚ 전례서‚ 영대‚ 수건‚ 십자고상 등등의 물품이 들어 있다. <참고> 김수환(金壽煥) 추기경(1922-) 서울대교구장. 세례명은 스데파노. 본관은 광산(光山). 김동한(金東漢‚ 가오르) 신부의 아우. 경북 대구 남산동에서 김영석(金永錫‚ 요셉)과 서중하(徐仲?‚ 마르티나)의 6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조부 때부터인데‚ 조부인 김보현(金甫鉉‚ 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戊辰迫害) 때 충남 논산군 연산(連山)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조모인 강말손(?末孫)도 남편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임신한 몸이었으므로 석방되어 영석을 낳게 되었으며‚ 영석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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