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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옹기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쌀을 담아 두는 독. (일반사항 및 특징) 쌀은 보리 ·밀과 함께 세계적으로 중요한 농산물이다. 세계 총생산량의 약 92%는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생산되며‚ 또 그 대부분을 아시아 사람들이 먹고 있다. 한국도쌀의 주요 생산국의 하나이고‚ 또 쌀은 한국인의 주식이다. 벼의 재배 기원에 대해서는 고고학자들이 많이 연구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보면 인도에서는 BC 7‚000-5‚000년대에‚ 중국에서는 BC 5‚000년경(神農時代)에 벼를 재배하였다고 한다. 한국에는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선사시대 유적지에서 발굴된 탄화된 쌀이나 벼의 탄소 동위원소 연대추정(carbon dating) 및 기타 고고학적 증거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한국에 쌀이 보급되기 이전에는 잡곡(피 ·기장 ·조 ·보리 ·밀 등)을 주식(主食)으로 하였으나 1천여 년 전‚ 즉 통일신라시대부터 벼의 생산량이 많아지면서 쌀이 우리 식생활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결국 쌀이 들어오면서 분식(粉食) 중심에서 쌀밥 중심의 식생활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 한국에서 쌀이 차지한 정치적 ·경제적 ·농업기술적 위치는 너무나 뚜렷하다. 쌀은 5∼6세기경까지만 해도 귀족식품으로 인식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주식 유형을 보면 북부는 조‚ 남부는 보리‚ 귀족층은 쌀이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쌀은 물가의 기준이요 봉급의 대상으로 할 정도로 귀중한 존재가 되었다. 쌀의 생산량이 좁쌀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차차 좁쌀보다 많아져 곡류의 대표격이 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온 후부터라고 생각된다. 쌀을 이용하는 방법으로는 옛날부터 낟알로밥을 지어 일상식품으로 하였고‚ 분식으로서는 가루를 내어 떡을 만들어 명절이나 제사 때 별식으로 사용하였다. 독의 중요성은 그 원시성(原??)에 있다. 인류가 최초로 만든 토기는 독이었다. 둥글고 깊게 팬 토기의 밑바닥은 뾰족하거나 둥글지만 아가리는 반드시 널따란 모양이었다. 덴마크의 엘테벨레의 어렵인(漁獵人)들은 밑바닥이 뾰족한 독을 사용하였다. 북부 유라시아 어렵인들 사이에 널리 퍼진 밑바닥이 뾰족한 독과 밑바닥이 둥근 독은 여기서 그 전통을 잇는다. 이 독은 그대로 불에 올려놓으면 냄비와 솥의 구실을 하는데‚ 말하자면 음식 익히는 그릇이다. 받침대가 딸린 것이기는 하지만 북부 유라시아의 청동솥은 이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집트의 최고기(最古期)에 농경인들이 사용하였던 그릇 중에서도 얕은 두세 개의 작은 그릇 외에는 독이 가장 많이 출토되었다. 어쨌든 항아리 모양의 토기가 없었던 것은 서로 대립되는 2대양식이었다. 다만 항아리가 주로 저장용이었다면 독은 음식 익히는 그릇으로 썼다. 중국의 채도문화기(彩陶文化期)에도 이 두 가지 형식의 대립은 나타난다. 확실하다. 동양에서도 토기 문화는 처음부터 독이 주였다. 시초에는 밑바닥이 뾰족하였다가 둥근 것으로 변하였고 후에 널따랗게 되었으며 다시 원통 모양의 토기로 발전하였고‚ 어떤 것은 상반부가 넓어져 장식적인 것이 되었지만 독임에는 틀림이 없다. 항아리가 발견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항아리가 나온 후에도 독의 중요성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으며 항아리와 독은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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