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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선생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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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홍진선생묘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독립운동가 만오 홍진선생(1877-1946)의 묘비. 홍진선생은 3.1운동때 13도대표 소집책임자로서 인천의 만국공원(萬國公園-지금의 자유공원)에서 국민대회를 열고 한성정부(漢城政府)를 조직하였다. 이어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부‚ 내무‚ 외무총장을 역임하였다. 1941년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원장에 피선되어 해방때까지 김구선생과 함께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여 귀국하였으나 1946년 9월 병환으로 별세하였다. 선생의 묘소는 원래 인천시 남구 관교동에 있었으나‚ 1984년 국립묘지로 이장함에 따라 묘비만을 박물관으로 이전하였다. 홍진(?震: 1877-946)은 본래 충북 영동 태생으로 대한제국 시절 한성 평리원 검사‚ 충청 검찰청 검사를 역임하고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법무총장‚ 내무총장‚ 의정원 의장‚ 국무령을 역임했다. 한편 1928년 김구‚ 이동녕 등과 한국 독립당을 창설해 최고 간부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1938년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해 한국광복군이 결성되자 운영간부에 선임되는 등 독립운동으로 일생을 보냈다. 해방 후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귀국해 서울에서 1949년 병사했다. 선생의 묘는 3`1 운동 당시 인천과 맺은 인연으로 그랬는지 묘를 인천 관교동에 썼다. 그 후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이 수여되었고‚ 묘도 국립묘지로 이장되고 비석은 현재의 자리로 옮겨다 세우게 되었다. 홍진선생이 인천과 인연을 맺게 된 일은 1919년에 전국에서 일어난 3`1운동이다. 그는 독립선언에 대한 실천 방안으로 내놓은 `한성정부 수립안`을 주도적으로 실천했다. 한성 임시정부 수립안은 191년 4월 23일 13도 대표 24인으로 조직된 회의에서 선포되었고 그 장소는 인천 만국공원으로 되어 있다. 본래 홍진‚ 한남수‚ 김사국‚ 이규갑 등이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선포하기로 결정했다가 사정에 의해 연기되었다. 종교계 인사들의 대거 참가가 특징으로 홍진‚ 이규갑‚ 한남수 등이 4월 8일 상해로 망명한 상태에서 연합통신을 통해 해외로 알렸다. 본 유물은 독립운동가인 만오 홍진(晩? ?辰)선생의 묘비로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46년에 새워졌다. 재료는 대리석을 사용하였다. 묘비의 아래로는 화강암을 사용하여 단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1931년 길림에서 선생이 남긴 "靑年 同胞여 病든 나라 고치는 病院의 일꾼이 되자"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글귀 양 옆으로 활짝 핀 무궁화 한 송이씩을 양각하였고 아래로는 안상을 새겨 넣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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