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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군자-대나무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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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사군자-대나무그림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본 작품은 사군자로‚ 시기는 일제강점기이다. 사군자란‚ 한국·중국·일본 등에서 회화(繪畵)의 제재(題材)가 되는 매화(梅)·난초(蘭)·국화(菊)·대나무(竹)의 총칭으로서‚ 이 4가지가 초목이나 꽃 중에서도 기품 있고 고결한 군자와 같다 해서 붙여진 호칭이다. 많은 문인고사(文人高士)들이 이 4가지 소재를 즐겨 그림으로써 스스로의 청고(?高)하고 돈아(敦雅)한 정취와 품격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그림의 소재가 되기 훨씬 이전에 시문(詩文)의 소재로 등장하였다. <사군자>라는 총칭이 생긴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명(明)나라 때로 추정되는데‚ 매·난·국·죽의 순서는 춘하추동(春?秋冬)의 순서에 맞추어 놓은 것이다. 회화(繪畵) 소재로서의 사군자는 대체로 당(唐)나라때 이미 그려지기 시작했으며‚ 북송(北宋) 시대부터 크게 유행하였다. 1167년에 나온 등춘(鄧椿)의 《화계(畵繼)》에 의하면 북송 때 이미 4가지 식물이 모두 묵화로 그려져 후대 문인묵화로서의 사군자화의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한다. 사군자화는 산수화나 인물화에 비해서 비교적 그리기가 간단하고 서예의 기법을 적용시켜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여기화가(餘技畵家)인 문인들에게는 가장 적절한 소재였다. 또한 서예의 필획 자체가 쓴 사람의 인품을 반영한다는 원리의 연장에서 사군자화도 그 화가의 인품을 반영한다고 믿어져 문인화의 가장 적절한 소재로 발달되었다. 중국에서 묵죽(墨竹)을 사대부의 화목(畵目)으로 발달시킨 학자는 북송의 소식(蘇軾)과 문동(文同)인데‚ 이들은 <흉중성죽(胸中成竹)>을 제창하여 성정(??)의 의경(意境)을 추구하였으며‚ 황정견(黃庭堅)과 함께 송대(宋代) 문인삼걸(文人三傑)로 꼽힌다. 그리고 역시 북송의 승려화가인 화광중인(華光仲仁)은 묵매화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원(元)나라 때는 몽골족에게 나라를 잃은 한족(漢族)문인들 사이에서 지조(志操)와 저항의 표현으로 널리 애호되었으며‚ 문인화 이론이 한층 발달하였다. 한편 송나라 때부터 개별적인 화보(畵譜)를 통해 일반에게 보급되었던 사군자화는 청(?)나라 초기 이후 총괄적인 화보가 발간됨으로써 더욱 널리 유행하였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송·원나라의 영향으로 사대부화가 생기기 시작하여 많은 사대부들이 묵죽·묵매를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사대부계층은 물론 화원(畵員)들도 사군자화를 많이 그렸다. 그리하여 15∼16세기부터는 매·죽의 그림이 청화(靑華)·진사(辰砂)·철사(鐵砂) 백자에 나타나고 난·국도 조금 늦게 백자의 표면그림으로 나타난다. 조선시대의 사군자화는 중국의 영향하에 발달되었으나‚ 김정희(金正喜)의 묵란과 묵죽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작가 개인의 특성이 잘 반영된 독자적인 양식이 수립되었다. 본 작품은 이러한 사군자 중 대나무 그림이다. 대나무는 옛부터 문인사대부들의 가장 많은 애호를 받으면서 사군자의 으뜸으로 꼽혀왔는데‚ 그것은 대나무의 변함없는 청절한 자태와 그 정취를 지조있는 선비의 묵객들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늘 푸르고 곧고 강인한 줄기를 가진 이러한 대나무는 그래서 충신열사와 열녀의 절개에 비유되기도 하였다. 화폭 중간에 대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대는 엷은 담묵으로 처리했고‚ 잎은 담묵과 농묵으로 처리하였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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