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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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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괴석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통 수묵화에서 암석화(岩石畵)를 그린 사람들은 주로 사대부 계층으로 당시의 지도층이었다. 유교적 윤리는 사대부들이 스스로 갖추어야 할 인격 수양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고‚ 그들은 역경 속에서도 굽힘 없는 지조와 절개‚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청빈한 기개‚ 그리고 남부끄러움 없는 양심을 생명처럼 소중히 하였다. 그런 선비들에게 있어서 돌은 언제나 인간에게 인간 조건의 불완전성·변절성을 초월한 어떤 절대적인 힘을 계시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바위 자체의 현실적 실존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유교적 가치관에 기초한 선비들의 시각을 통해 터득된 것이었다. 그들은 바위를 영원불멸의 상징이며 또한 비바람을 가리지 않고 말없이 의연한 그 자태를 실로 군자의 풍모를 풍기는 상징물로 보았고‚ 이를 통해서 개인의 인격 수양에서 비롯하여 사회적 윤리관까지도 배양할 수 있는 교훈적인 의미를 찾아내었다. 옛날 중국 북송의 미불이 바위를 형님이라 부르며 절을 한 것도 바위에서 인간의 변절성을 초월한 어떤 항구적 힘과 윤리적 교훈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화가들이 뛰어나게 아름다운 것도 희귀한 것도 아닌 평범한 바위를 즐겨 그렸던 것은 바위가 상징하는 그와 같은 윤리적 특성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화가들은 바위를 미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윤리적 가치관에 침잠하여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이것은 같은 암석이지만 자갈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 뜻이 명백해 진다. 화가들이 자갈을 그리지 않는 것은 자갈에서는 그러한 윤리적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본 작품은 조선 말기 선비화가인 허련(許鍊‚ 1809-1892)이 그린 괴석도로‚ 종이에 담채한 쌍곡병풍이다. 허련은 본관은 양천‚ 호는 소치(小痴)이며‚ 이후 중국 당나라 남종화와 수묵산수화(水墨山水畵)의 효시인 왕유(?維)의 이름을 따라서‘허유(許維)’라고 개명(改名)하였다. 초년에는 해남의 윤선도 고택에서 윤두서의 작품을 통하여 전통화풍을 익혔다. 대흥사 초의(草衣)의 소개로 1839년에 상경하여 김정희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서화를 수업하였다. 그는 스승 김정희가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다. 본 작품의 바위는 온갖 풍상을 겪으며 군더더기를 다 떨어버린 천지의 뼈대 모습으로‚ 적막 속에 싸여 있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돌 하나가 무슨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같이 보이지 않으나‚ 허련은 괴석에서 자연과 예술의 지극한 경지를 보았고‚ 조형화 된 것이 아니라 형성되었다고 해야 할 이 괴석의 경이로움과 오묘함을 화폭에 담으려고 노력했을 것이 분명하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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