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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겸필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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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김용겸필서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작가> 김용겸(金用謙‚ 1702-1789)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자는 제대(濟?)‚ 호는 교교재(膠膠齋)‚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어려서 족형(族兄)인 김시보(金時保)에게서 학업을 닦았으며‚ 1722년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백부 김창집(金昌集)이 사사(賜死)될 때 전주(全州)에 유배(流配)되었다가‚ 1725년 풀려나 이재(李縡)?박필주(朴弼周)에게서 경서(經書)?예서(禮書)를 수업했다. 그의 나이 77세(1778)에 우승지(右承旨)가 되었으며 1784년에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1786년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이 서간은 무신년(戊申年:1788) 7월 27일에 용겸(用謙)이 보낸 것이다. 용겸은 이 편지에서 상호간에 내왕한 편지 횟수와 친족의 안부 및 집안의 흉사에 대해 걱정하였다. 먼저 그는 상대방으로부터 6차례 편지를 받고 자신 또한 답장을 하였는데‚ 그것이 2차례라고 하니 보낸 편지 중 이전 5월과 이번 달에 보낸 것이 전달되지 않은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였다. 다음으로 그는 완흥(完興)의 요절사실을 듣고‚ 앞 뒤로 일어난 집안의 흉사 중 이 일이 가장 참혹한 것이며 집안의 희망이 끊어졌다고 애통해하며 9대조의 집터와 선롱(先壟)이 있는 문동(文?)에서 어찌 잠시라도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런데도 상대방이 임기가 완료되어 이곳으로 돌아가 살 것이라고 하니 자신은 능히 할 말이 없다고 하였다. <기타참조> "강운 명품선"‚ 순천대박물관‚ 2001. <참고문헌> "강운 명품선"‚ 순천대박물관‚ 2001. "한국인물대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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