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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도(종석)필 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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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곽도(종석)필 서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개설> 서간은 일반 글과는 달리 말 대신 쓰는 글로 수신인이 있고 수신인과의 관계에 따라 적절한 예법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서간문이라는 형식이 생겨났다. 발신인(發信人)‚ 수신인(受信人)‚ 용건(用件)의 구성요소를 가지며‚ 이두로는 고목(告目)‚ 기별이라고 하고‚ 조선시대 이전부터는 우무‚ 유무‚ 글월이라 하였으며‚ 조선 후기에 와서 편지라는 말이 쓰였다. 순한문이나 이두문을 섞어 쓰는 한문서간과 순한글이나 한자를 섞어서 쓰는 언간(諺簡)이 있으며‚ 한글편지는 내간(內簡)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한문서간에는 수필과 평론의 구실을 하는 문학작품인 것도 있어 한묵(翰墨)이라는 명칭도 생겼다. 내용에 따라 문안(問安)‚ 평신(平信)‚ 하장(賀狀)‚ 위장(慰狀) 등으로‚ 용도에 따라 실용서간과 문예서간으로 나뉜다. 현대의 편지글에는 한문서간과 일본서간이 스며 있다. <작가> 곽종석(郭鍾錫 1864-1919)의 본관은 현풍(?風)‚ 자는 명원(鳴遠)‚ 호는 면우(宇)로 경상남도 산청(山?)에서 출생하였다. 고종 초기 음보(蔭補)로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이 되었으며‚ 1903년 비서원승(秘書院丞)에 특진하였고‚ 이어서 참찬(參贊)으로 시독관(侍讀官)을 겸하였다. l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폐기와 조약 체결에 참여한 매국노를 처형하라고 상소하였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 유림(儒林)들의 궐기를 호소하고‚ 거창(居昌)에서 김창숙(金昌淡)과 협의하여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독립호소문을 보내고 옥고를 치렀다. 이황(李滉)의 학문을 계승한 스승 이진상(李震相)에게서 성리학을 이어받아 주리(主理)에 입각하여 이기설(理氣說)을 주장하였다. 저서에 《면우문집(宇文集)》이 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이 서간은 곽도가 황원에게 쓴 것이다. 이 사람은 불행하게도 매천(梅泉)이 살아 계실 때 알아보지 못했으나 다행히 매천께서 어진 동생이 있어 서로 소식을 전하고 묻는 것을 욕되다 아니하고‚ 또 훌륭한 아들이 있어 정답게 서로 만산(萬山) 속에 찾아오며‚ 이에 또 매천의 유문을 받들어 읽으니‚ 이제는 매천을 알지 못한다고는 못하겠습니다. 병든 사람이 헐떡거려서 아침 저녁 사이에 곧 죽을 것 같으니 장차 이것을 인연으로 하여 구원(九原)에서 친분(親分)을 맺을 수 있으려는가? 형께서 상배(喪配)하신 슬픔이 있다는 것을 들었는데‚ 삼가 생각건대 부부의 정의가 중한 것이라 신산(辛酸)과 애통함을 어찌 견디십니까? 나아가 위로할 수가 없으니 몇 자 적으며 같이 걱정할 뿐입니다. 영질은 단정하고 빼어나 일찍 성취(成就)했으니‚ 부형으로부터 잘 배운 것을 알겟습니다. 간절히 부러워하나 정신이 혼몽하여 아무런 보탬이 되어 드릴 수 없으니 더욱 부끄럽습니다. 나머지는 갖추지 못하오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계축년(1913) 1월 29일 병제(病第) 곽도(종석) 재배 <기타참조> "국역 황매천 및 관련인사 문묵췌편" 상‚ 미래문화사‚ 1985. <참고문헌> "국역 황매천 및 관련인사 문묵췌편" 상‚ 미래문화사‚ 198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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