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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생원황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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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성균생원황현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작가>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은 조선 말기의 학자로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 당호는 소호당주인(韶濩堂主人)‚ 본관은 화개(花開)이다. 개성에서 태어난 그는 17세에 성균초시에 합격하였고‚ 20대 중반 약관의 나이에 이건창(李建昌‚ 1852-1898) · 황현(黃?) 등과 교유하면서 문맹을 날리기 시작했다. 1880년대 초반에 김윤식의 소개로 중국의 학자들과 접촉하며 견문의 범위를 넓혔다. 1894년의 관제개혁에 의해 편사국(編史局) 주사(主事)로 활동하면서 역사편찬에 힘을 기울였다. 1905년 가을에 상해로 망명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하다가 1911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황현의 시집을 간행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중국에 체류중이던 1927년에 강소성(江蘇省) 남통(南通)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저서로는《동국역대사략(東國歷代史略)》을비롯하여《역사집략(歷史輯略)》·《교정삼국사기(校正三國史記)》·《한사경》·《창강고(滄江稿)》?《소호당집(韶濩堂集)》등이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이 글은 중국 회남(?南)에 망명중이던 그가 황현이 순국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서 1911년 음 3월에 찬술한 전기(傳記)이다. 황현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이 글의 전반에 배어난다. ‘충의혈성(忠義血?)’을 높이 평가하면서 과거응시에 관한 사항과 순절시 4수를 남기고 순절하는 과정 등을 매우 상세하게 적었다. 이들의 교유는 신교(神交)라 일컬을 정도로 돈독했는데‚ 그러한 인연으로 김택영은 매천의 시집을 교정 · 간행하는 책임을 맡은 바 있다. 그리고 그가 융희(隆熙)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점이 특이하게 보인다. <기타참조> "강운 명품선"‚ 순천대박물관‚ 2001. <참고문헌> "강운 명품선"‚ 순천대박물관‚ 2001. "한국인물대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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