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이미지

진주성도

추천0 조회수 34 다운로드 수 0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진주성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작가> 작가를 알 수 없다. <일반 형태 및 특징> 진주성 일대를 그린 산수화풍의 회화식 지도로 적어도 8폭 이상의 작품으로 구성된 병풍 연작 중 중간에 해당하는 부분작으로 추정된다. 이는 주요 건축물을 화면의 중앙에 배치하는 회화식 지도의 일반적인 구도에서 볼 때 진주성을 화면 아래쪽 측면에 그것도 부분만 묘사하고 있는 점에서도 이 그림의 양쪽으로 화폭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그림의 상단의 중앙에 ‘충익부인(忠翊府印)’이라 새겨진 전각(篆刻)이 우선 주목되는데‚ 당대(唐代)에 처음 생겨나 남송과 원을 거쳐 명?청대에 그 테두리가 점차로 굵어진 구첩전(九疊篆) 형식으로 조선 중?후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주로 관인(官印)으로 사용되었다. 충익부는 원종공신(原從功臣)과 그 자손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아로 조선시대 초에 설치되어 병조(兵曹)에 폐합되는 등 치폐(置廢)를 거듭하다가‚ 1699년(숙종 25년)에 충훈부(忠勳府)에 통합되었다. 따라서 이 전각은 그림의 제작시기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 또한 본래 흙벽이던 진주성벽이 그림에 나타난 것처럼 석축(石築)으로 다시 완성된 것이 1680년(숙종6년)인 점을 감안할 때 대략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일단 추정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1797년 충익부에서 양무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인 김사남(金巳男)의 자손인 김철동(金哲同) 등에게 작성해준 등급 기록의 앞머리에서 ‘충익부위등급사절(忠翊府爲騰給事節)’이라고 적고 그 끝부분에 충익부의 도장이 찍혀있는 문헌(서울대 규장각 소장) 에서도 확인된 바와 같이 이미 충훈부에 이속(移屬)된 후에도 원종공신의 후손에 대한 문제를 다룰 때는 충익부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전각만으로 정확한 시기를 구분하기도 매우 어려운 입장이다. 다만 그림을 제작하는 일선의 실무를 맡았을 화원의 제작 특성을 고려해 그림에 나타난 수지법과 암산의 준법 등을 중심으로 볼 때‚ 19세기초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화면의 좌우 중앙에 위치한 세 개의 산을 각각 개성 있는 필치로 묘사하고 있는데‚ 화면 상단의 중앙에 위치한 주산은 태점을 사용하여 묘사하였고‚ 피마준과 미점으로 묘사된 좌우 산에 비해 그리 높지 않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화면 하단에 진주성은 부분만 묘사되어 있는데 서문(西門)인 의정문(義正門)이 보이고‚ 그 안쪽으로 이 서문의 지휘장대인 서장대(西將臺)가 서있다. 성 안쪽 서장대와 창렬사 사이에 위치한 호국사(護國寺)의 일부가 보이는데‚ 성내에 있다고 해서 내성사(內城寺)라고도 실은 배‚ 군데군데 떠있는 배 위에 낚시 대를 드리운 사람들의 모습이 다채롭게 묘사되어 마을 사람들의 주요 운송방법과 생업의 보조수단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마을 건너편의 근산(近山)의 모습을 화면의 하단에 배치함으로써 화자(畵者)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점이 그림지도를 보는 재미를 더한다. 전체 작품 중 일부만 전하는 점이 많은 아쉬움을 남기지만‚ 이 지도와 유사한 구도와 형태로 19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진주지도>(참고도. 3)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 작품의 전체적 구도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그림 지도에서와 같이 ‘충익부’라는 국가기관의 관인이 찍혀 있는 것은 보기 드문 예로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으로 보인다. <기타참조> "강운명품선"‚ 순천대박물관‚ 2001. <참고문헌> "강운명품선"‚ 순천대박물관‚ 2001. "한국회화사"‚ 안휘준‚ 일지사‚ 1980. "한국회화의 전통"‚ 안휘준‚ 문예출판사‚1988. 불리는 이 사찰은 숙종 대에 호국사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다. 성의 구도는 역시 평행투시도법에 근거해 그리고 있으나 일부는 정면시를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앞의 그림과 달리 부감시에 더 충실하게 묘사되고 있다. 화면 위쪽 집현산(칠평산)에서 시작된 나불천(川)이 대각선과 곡선을 이루면서 화면의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또한 그 천변의 전답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충익부의 주요업무가 공신들의 녹훈(錄勳)을 맡아보는 일이었던 점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사료된다. 남강으로 합류되기 직전 강 지류 위의 다리는 지금의 계름교가 있는 곳으로‚ 성밖의 마을과 성내를 연결하는 주요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화면 하단에는 땔나무를 가득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