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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백당선생일고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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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인백당선생일고 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2-0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인백당의 유고이다. <일반적인 형태 및 특징> 자는 태화(泰和)요‚ 호는 인백당(忍百堂)이며‚ 관은 순천(順?)이니 평양부원군 양경공(平陽府院君 襄景公) 승주(承주)의 6대손이다. 중종 25년(1525)에 출생하여 21세 때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생원(生員)이 되었으나 나라에서 파방(罷榜)을 시키니 그 후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퇴도문인(退陶門人)으로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친상에 여묘 3년을 다하고 일찍이 말하기를 “향당은 부모종족(父母宗族)이 있는 곳이라”하여 반드시 말(馬)을 내렸다고 한다.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은거하여 도를 구하고 실천하는데 독실했으며‚ 부친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다. 호는 인백당(忍百堂)이고 소양 향현사에 향사하게 되었다. 김낙춘(金樂春) 묘갈(墓碣) : 권상일(權相一)이 지은 서문에옛날 우리나라 퇴계 이 선생께서 도산에 강도(講道)할 때 한 시대의 제현(諸賢)이 문하에 왕래하였는데 인백당 김공이 그 중 하나였다. 공의 이름은 낙춘(樂春) 자는 태화(泰和)인데 그의 조상은 순천인이다. 공은 풍도가 아주 깨끗하고 성격도 매우 침착했으며 학문에 힘쓰기를 독실히 하여 문예가 일찍 이루어졌다. 나이 21세 때 진사시험에 합격했는데 국가에서 무슨일로 인해 파방(罷榜)시켰다. 다시는 거업(擧業)에 힘쓰지 않고 성현(聖賢)의 경전(經殿)에만 마음을 붙였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모든 경전(經典)중에 오직 춘추(春秋)만이 성인(聖人)의 수필(手筆)이다”라고 하면서 깊이 생각하고 익숙하게 읽었는데 모경(暮境)에 이르도록 걷어치우지 않았었다. 파청정(把?亭) 김부의(金富儀)와는 내외종(內?從)이 되었는데 늘 한 방안에 모여서 경의(經義)를 강구(講究)하였다. 같은 문하에 다니는 어떤 사람이 일찍이 횡액에 걸려들어 화를 헤아릴 수 없게 되자 선생께서는 매우 걱정하였다. 공이 그에게 찾아가 무사하도록 만들고 그와 함께 도산으로 와서 선생을 뵙게 되었다. 선생께서 매우 기쁘게 여기고 시를 지어 주었는데 그대의 높은 풍의(風義) 하늘까지 당하겠구나 우물 속에 빠진 사람 재빨리 건져내어 잘 구호하여 나에게 찾아와 부탁한 다음 은혜로운 그 마음 자랑하지 않고 그냥 가 버리네 라고 하였는데 이 시는 도산집 속에 실려져 있다. 공은 천성이 효도에 지극하였다. 친상을 당하였을 때 수질과 요대를 늘 벗지 않고 묘 아래에 여막을 지어 묘를 지키면서 아침 저녁으로 참배하였다. 부인 신씨가 일찍이 병이 위독하여 공을 한번 만나자고 간청하였으나 공은 “상제로서 내실을 멀리한다”는 이유로 끝내 만나주지 않았었다. 일평생 몸가짐에 대해서는 검소한 생활로 옷은 반드시 베옷을 입고 음식도 여러 가지 반찬으로 하지 않았다. 모년에는 문경 산수를 사랑하여 안동 풍산 가곡을 떠나 가은 소양동으로 이거하였다. 독서하는 시간외는 낚시질도 하고 갈매기를 친구로 삼으면서 낙을 붙였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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