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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필(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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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체필(單)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2-0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해서(楷書)를 엮어서 만든 법첩(法帖) <일반적인 형태 및 특징> 해서(楷書)는 일점일획(一點一畵)을 정확히 독립시켜 쓴 서체를 말하는데 정서(正書) 혹은 진서(眞書)라고도 한다. 해서는 예서(隸書)에서 변화‚ 발달되었으며 후한(後漢) 말기에 이 서체를 볼 수 있지만 독립된 서체로서 완성되지 못하고 위‚ 진(魏晉) 이후에 비로소 예술적으로 완성되었다. 그 당시 해서를 금례(今隷)라 한 것을 보면 그 발생과정을 알 수 있다. 이후 남북조(南北朝)시대에 북위(北魏)의 《용문석굴조상기(龍門石窟造像記)》‚ 《장맹룡비(張?龍碑)》‚ 《고정비(高貞碑)》 등의 방필(方筆)과 《정희비(鄭羲碑)》를 비롯하여 운봉산(雲峯山)의 제각(諸刻)의 원필(圓筆)로써 큰 흐름을 이루었다. 이후 초당(初唐)에 이르러 우세남(虞世南)‚ 구양순(歐陽詢)‚ 저수량(椧遂良) 등이 배출되면서 해서의 전형이 완성되었다. 이 세 사람의 작품은 해서의 극치로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중당(中唐) 때 안진경(顔眞卿)이 원세(圓勢)를 가미한 새로운 서풍을 이루었고 이상의 4대가 이후에는 이들에 필적할 작품이 없다. 송대(宋代)에는 왕희지 등의 법첩(法帖)을 주로 해서 서체를 익히는 첩학(帖學)이 중시되어‚ 소식·황정견· 미불 등 사대가는 행‚초가 많고 해서(楷書) 등도 있으나 서예사에 있어서는 회화에서 산수화 부분의 획기적인 발전과는 대조적으로 비교적 부진한 형편이다. 원대에는 역시 첩학을 중시했고‚ 조맹부가 시‚ 서‚ 화에 두루 능해 영향력이 컸고‚ 이외에 가구사·선우추 등이 있다. 명대에 이르면 송이래의 첩학이 대성하여 행‚ 초에서 진전이 이루어지고 이와 대조적으로 해서에선 뚜렷한 진전이 없었다. 대체로 삼기로 나누어 초기에는 삼송(三宋)으로 불리는 송극‚ 송광‚ 송수와 해진이‚ 중기에는 축윤명‚ 문징명‚ 왕총 등이‚ 말기엔 형동‚ 장서도‚ 동기창‚ 미만종 등이 크게 이름을 날렸다. 청대 초기엔 특히 황제들의 큰 관심 속에 원과 명의 서체들이 유행되었으니‚ 강희제(康熙帝)는 동기창을‚ 건륭제(乾隆帝)는 조맹부의 서체를 좋아하고 장려해서 크게 유행하였다. 19세기후반에 이르러 첩학에서 벗어나 비각(碑刻)의 문자를 익히는 이른바 비학(碑學)이 일어나 크게 대성했다. 비학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등석여‚ 하소기‚ 장유쇠 등이다. 이에 전(篆)‚ 예(隸)‚ 해서(楷書)가 두루 크게 진작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서예사의 전개는 그대로 우리나라에 반영되어 왔으며 조선시대에 한글이 창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문화가 중국문화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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