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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관 (錦城館 ‚ Geumseonggw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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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금성관 (錦城館 ‚ Geumseonggwan )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5-29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금성관은 나주목의 객사건물이다. 객사란 고려~조선시대때 지방궁실로써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와 궐패(闕牌)를 모셔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고을의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을 양쪽의 익사(翼舍)에서 유숙하게 하던 곳이다. 지방의 도읍지에 관아건물이 들어서면 일반적인 경우는 중심축선상에 동헌과 정문‚ 루문 등이 자리하고 주변에 육방관속의 건물과 내아들이 위치한다. 나주읍성내에는 나주목사내아(內衙)‚ 관문(官門)인 정수루(正綵樓)‚ 나주향교 등이 인근에 있다. 금성관 정문은 망화루였는데 일제시대에 없어졌다.
금성관은 조선 성종 18~20년(1487.4.12~1489.7.20) 동안 이유인목사가 2년여 동안 재직하면서 김춘경목사가 건립한 객관의 동헌인 벽오헌 옆에 금성관과 벽오헌 남쪽에 망화루를 건축하여 궁실의 구조를 갖추었다. 이후 선조 36년(1603)에 크게 중수를 하고‚ 고종 21년(1884) 박규동 목사가 3창을 했다. 최근에 와서는 1963년 9월에 보수하였고‚ 다시 1976년에 완전 해체하여 거의 원형에 가깝도록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창호.마루등 내부를 개조하여 나주군청 청사로 사용되면서 유리창문을 달아 쓰기도 했으나 현재는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금성관은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그러나 칸넓이나 높이가 다른 건물보다 크게 되어 정청으로서의 위엄을 더한다. 금성관의 공포형식은 익공형을 하고 있다. 원래 익공집은 궁궐이나 정전 등의 부속건물과 누각‚ 정자 등에 많이 사용되었다. 조선중기 이후부터는 목조건물에 있어서는 다포계와 주심포계가 혼용되다가 새로운 형태로 익공계 양식이 대두되었다. 금성관은 고흥의 존심당과 함께 익공형식으로 관아건물의 유사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내부는 모두 대청으로 꾸몄으며 우물마루를 깔았고‚ 대형의 막돌초석에 약간의 배흘림을 둔 두리기둥을 세웠다. 내부에는 10개의 내진고주(內陳高柱)를 세웠으며 기둥 위로는 주두(柱頭)를 얹고 창방을 걸었으며 주칸마다 소로 2개 화반 1구씩 배치하였다. 공포는 주심포계 익공식으로 살미첨자와 끝은 쇠서로 되었고 행공첨차를 두어 외목도리를 받게하였다. 가구는 내진고주 위로 대량을 걸고 그 위로 동자주를 놓은 다음 종량을 얹힌 9량가(樑架)로 되어 있다.창호의 구성은 중앙 세칸은 4개의 빗살문으로 되었고 양쪽 퇴칸에는 빗살문 2개를 달았다. 측면 역시 빗살 창문으로 중앙 2칸은 4짝‚ 양편 2칸에는 두짝이다.
금성관 공포구조는 나주향교 대성전의 공포구조와 비슷하여 조선 중기 나주지역의 건축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기타정보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kcti.re.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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