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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릉 (西三陵 ‚ Seosamneung Tomb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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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서삼릉 (西三陵 ‚ Seosamneung Tombs )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5-29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 개요 >
사적 제200호이다. 한때 이곳에 있었던 중종(中宗)의 정릉(靖陵)을 중심으로 희릉(禧陵)·효릉(孝陵)이 있는데‚ 그 근처에 왕실 묘지가 이루어져 명종(明宗)·숙종(肅宗) 이후 한말까지 역대의 후궁·대군·군·공주·옹주의 묘가 만들어졌고‚ 고종(高宗) 원년에 예릉(睿陵)이 들어서면서‚ 효릉·희릉·예릉의 3능을 일컬어서 서삼릉이라 하였다.
ㅇ 이용시간 : 3~10월 06:00~18:30‚ 11~2월 06:30~17:30
ㅇ 휴무일 : 매주 월요일
< 규모 >
ㅇ 면적 : 7만평
< 주요시설 >
ㅇ 효릉
중종의 아들 인종(仁宗)과 그 비(?) 인성왕후 박씨(仁聖?后朴氏)의 능이다. 효릉은 왕릉과 왕비릉을 난간(欄干)으로 연결한 쌍릉(雙陵)의 제도로 썼으며‚ 왕릉에는 양우석(兩隅石)에 운채(雲彩)와 면석(面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새겨진 병석(屛石)을 돌리었다. 당초 시대적인 상황으로 상례절차를 감쇄(減殺)하여 산릉(山陵)공사에 소홀한 점이 많았던 모양으로 선조(宣祖) 10년에 효릉의 개수를 명하여 병석 등 석물(石物)을 다시 고쳐 넣었다.
ㅇ 희릉
중종의 계비(繼?) 장경왕후(章敬?后)의 능이다. 왕후가 승하하자 처음에는 능터를 광주(廣州) 헌릉(?陵) 구역 내에 택정하였으나‚ 이를 둘러싼 권력다툼의 결과로서 새로이 길지(吉地)를 찾아 현재의 위치에 모시게 하였다. 그 후 중종의 정릉이 희릉 곁에 정해지면서 정자각(丁字閣)을 양릉 사이에 옮겨 세우고 동원이강형식(同原異岡形式)을 취하게 되었다. 능제도는 병석 없이 난간만 두른 단릉(單陵)으로 석물의 배치며 장명등(長明燈)·석망주(石望柱) 등의 수법이 전기 능석물(前期陵石物) 양식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ㅇ 예릉
국말(國末)의 철종(哲宗)과 철인왕후 안동김씨(哲仁?后安東金氏)의 능이다. 능제도는 양릉을 나란히 놓아 난간으로 연결된 쌍릉제도를 취하고 있으며 능석물 양식상 융건릉(隆健陵)의 영향이 보인다. 즉‚ 융릉(隆陵)에서 8각 장명등과 4각 장명등의 운족양식(雲足樣式)을 합하여 새로운 양식을 이루고 있다. 능전 3계(陵前三階)는 이미 2계로 줄어들었고 장명등이 전방으로 나와 있는 것이 특이하다. 기타정보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kcti.re.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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