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어문

한글 고유의 의미를 담고자 했던 노력 - 한글 자판의 역사

추천0 조회수 239 다운로드 수 1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한글 고유의 의미를 담고자 했던 노력 - 한글 자판의 역사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9-10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1914년에 등장한 최초의 한글 타자기부터 기계식 타자기를 거쳐 오늘날의 컴퓨터 운영체제의 자판 시스템까지. 한글이 가진 고유한 의미를 담고자 노력했던 많은 연구자들의 시도를 통해 한글 기계화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테마로 보는 역사 한글 고유의 의미를 담고자 했던 노력한글 자판의 역사 세계 문자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독창적인 체계를 가진 우수한 문자로 인정받는 우리의 한글. 그러나 한글 기계화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한글만의 고유한 특성으로 인식되던 요소들이 한글 기계화 측면에서는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1914년에 등장한 최초의 한글 타자기부터 기계식 타자기를 거쳐 오늘날의 컴퓨터 운영체제의 자판 시스템까지. 한글이 가진 고유한 의미를 담고자 노력했던 많은 연구자들의 시도를 통해 한글 기계화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 명확한 문자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세종 28년(1446)에 만든 한문 해설서이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언해본 원문보기 ▶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문자사(文字史)에서 유례가 없는 독창적인 체계를 가지고 어느 한 시대에 갑자기 출현한 문자라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며‚ 그 창제 원리의 과학성은 놀라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또한 어느 나라 문자든‚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는 그 탄생 과정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데 반해‚ 훈민정음 한글은 1444년 1월(세종 25년)에 세종대왕이 천 · 지 · 인 삼재와 발음기관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기록을 남겨놓고 있다. 이렇게 진화가 아닌 의도적인 발명을 통해 창제된 한글은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유일한 문자이다. 한글은 1446년 반포 때부터 목판 글자를 시작으로‚ 금속활자로 발전하면서 과학성을 더하게 되었고 인쇄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한글 기계화’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글 타자기의 보급으로 기계화가 가속되었고‚ 라이노타이프‚ 노모타이프‚ 사진식자기를 거쳐 컴퓨터의 등장과 함께 한글 기계화는 계속 발전해 오고 있다. 한글 자판 개발‚ 왜 어려웠을까 한글은 다른 문자 체계와 달리 ‘초성-중성-종성’ 각각의 음소를 하나의 음절로 모아 써‚ 시각적으로 음절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한 문자이다. 이는 한글만의 고유한 특징이며 한글의 문자 체계가 간단하고 과학적이라 할 수 있는 구체적 근거이다. 그러나 한글 기계화 측면에서는 이토록 과학적인 모아쓰기가 큰 걸림돌이 되었다. 첫째‚ 한글 타자기는 한 음절의 글자 안에 종성(받침)까지 모아쓰기 때문에 알파벳 타자기처럼 한 글자를 찍을 때마다 종이가 움직이면 종성을 제자리에 찍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한글 타자기는 알파벳 타자기와 달리‚ 글쇠 일부는 글자가 찍혀도 종이가 움직이지 않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모아쓰기에서 ‘ㄱ’의 모양 변화. 각각의 경우에 따라 낱글자 ‘ㄱ’의 위치와 크기가 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둘째‚ 영어의 경우 로마자의 자모를 풀어쓰기 때문에 26개의 알파벳만으로 모든 단어를 쓰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한글의 경우 기본 자모는 자음 14개‚ 모음 10개로 전부 24개이지만‚ 실제 한글의 자모는 기본 24개의 자모 외에도 쌍자음과‚ ‘ㅐ’‚ ‘ㅝ’와 같이 두 개 이상의 기본모음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16개의 자모가 더해져 총 40개가 된다. 여기에 ‘ㄻ’‚ ‘ㄶ’과 같은 자음을 더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에 쓰이는 한글 자모들을 조합하여 만들 수 있는 음절의 수는 총 11‚172개에 이른다. 이에 따른 큰 문제는 모아쓰는 과정에서 낱글자들의 모양이 조금씩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타자기를 만들 때 몇 벌의 글쇠를 만들지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글씨의 아름다움을 중요하게 여기는 개발자는 작은 차이를 무시하더라도 4~5벌식의 글쇠를 갖춘 타자기를 개발하게 되었고‚ 타자의 속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개발자는 음절의 모양이 반듯하지 않더라도 글쇠의 벌수를 줄인 타자기를 개발하게 되었다. 광복 이전의 타자기 1934년 3월 2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조선문 타자기 완성 축하회 개최’ 기사. 송기주가 언더우드 포터블 타자기를 개조해 만든 네벌식 타자기에 대한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최초의 한글 타자기는 1914년 무렵 재미교포 이원익(李元翼)이 만든 것이다. 이원익의 한글 타자기는 미국에서 쓰이던 로마자 타자기의 활자를 한글로 바꾸어 만든 것으로‚ 세로모음과 함께 쓰는 초성‚ 가로모음과 함께 쓰는 초성‚ 받침 없이 쓰는 중성‚ 받침과 함께 쓰는 중성‚ 종성 이렇게 다섯벌식을 갖춘 세로쓰기 타자기였다. 또한 글자를 왼쪽으로 드러누운 꼴로 찍어‚ 나중에 인쇄한 종이를 오른쪽으로 돌려보면 세로로 쓰인 문서를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글쇠는 안움직글쇠여서 한 음절을 완성하고 사이띄개를 눌러 종이를 한 칸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1929년 무렵에는 송기주(宋基柱)가 언더우드 포터블 타자기를 개조하여 네벌식(옆자음‚ 윗자음 겸 받침‚ 복자음과 쓰이는 작은 자음‚ 모음) 세로쓰기 타자기를 개발하였다. 송기주는 192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주립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시카고대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면서 지도 제작 및 도안 일을 하던 중 이 타자기를 발명하게 되었다. 송기주 타자기는 1934년 초 신문을 통해 고국에 알려졌고‚ <동아일보>는 그해 3월 그를 서울로 초청하여 대대적인 후원회를 열기도 했다. 이 외에도 미국에서 활동하던 김준성 목사가 1946년 영문 타자기를 개조하여 한글 타자기를 만들었다. 이 타자기는 풀어쓰기 타자기로서‚ ‘한글날’을 타자기로 치면 ‘하ㄴ그ㄹ나ㄹ’과 같이 표기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설명한 타자기들은 재미교포들이 로마자 타자기를 개조해 개발한 것이기에 여러 한계점들을 갖고 있었고 대중화되지는 못했지만‚ 일제강점기의 고국에서는 시도조차 하기 어려운 한글 기계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데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공병우 타자기 안과의사였던 공병우가 만든 세벌식 타자기‚ 공병우 한영타자기. 세종대왕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광복 이후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어나며 한글 타자기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1949년 7월에 조선발명장려회에서 한글 타자기 현상공모를 하였다. 이 공모에서 대상은 없었고‚ 2등상 3명‚ 3등상을 2명이 수상하게 되었는데 2등상 수상자 중 1명이 공병우이고‚ 3등상 중 1명이 김동훈이었다. 공병우(公炳禹)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안과병원인 ‘공안과’를 세운 안과의사이다. 1938년‚ 안국동에 ‘공안과’를 열었는데‚ 우연히 환자로 안과를 찾은 국어학자 이극로(李克魯)를 만나 한글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광복 후 일본글로 되어 있던 시력검사표를 한글로 고쳐 만들고‚ [소안과학]이라는 책을 한글로 옮기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한글 타자기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글쇠의 벌수가 많았던 기존의 세로쓰는 타자기의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직접 한글 타자기를 만들기로 하였다. 1948년 2월‚ 공병우는 쌍초점 방식(초성과 중성은 움직글쇠‚ 종성은 안움직글쇠로 배당하고‚ 타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hangeul.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