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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도심 이야기]한밭권투체육관-원도심에 숨어있는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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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원도심 이야기]한밭권투체육관-원도심에 숨어있는 그 곳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5-20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한밭권투체육관을 찾다
현재 대전 원도심의 가장 번화한 곳은 중앙로이다. 대전역에서 옛 충남도청을 잇는 중앙로에는 곳곳에 금융기관이 입주해 있는 대형 건물과 백화점‚ 수많은 상점들이 빈틈없이 들어서 있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과 도로를 꽉 채운 차들‚ 최신 유행과 온갖 소음이 뒤섞여 현대라는 시간이 어떤 것인지 잘 살필 수 있는 거리이다.
이런 상업지구의 특징 중 하나는 가장 빠르게 변화한다는 것이다. 옷가게에 걸리는 옷들과 가게들의 간판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고 몇 달이면 새로 들어선 대형 건물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거리의 모습도 빠르게 달라진다. 이렇게 빠른 변화야말로 생명력이라 불리는 상업지구의 한복판에서 시간이 멈춰선 곳을 만날 수 있다.
한밭권투체육관. 공식적인 주소는 대전광역시 중구 은행동 142-4번지이다. 그러나 찾기는 쉽지 않다. 중앙로의 한복판인 중앙로역에서 내려 1번 출구를 찾아 지상으로 올라오자마자 그 자리에 선다. 사거리의 대각선 방향으로는 갤러리아 백화점이 위압적으로 서있다. 그 자리에서 뒤로 돌아보면 자그마한 치안센터가 있고 오른쪽으로 삼성생명 건물이 있다. 그 사이에는 소나무 몇 그루가 서있는 작은 화단이 있다. 그 소나무의 아래둥치 쪽을 보면 작은 한밭권투체육관의 간판을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중앙로역 1번 출구로 올라오자마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치안센터와 삼성생명 건물 사이 자그마한 골목을 찾을 수 있다. 낮에도 관심 없이 보면 지나칠 수밖에 없는 작은 골목‚ 지난밤 취객이 지른 오줌지린내가 날법한 그 골목은 1m도 되지 않는 폭으로 5m 정도 이어진다. 용기를 내어 들어서보라. 그러면 왼쪽으로 시간을 잊어버리고 있는 자그마한 나무 집을 하나 만날 수 있다.
볕도 잘 찾아들지 못하는 체육관 앞 작은 마당에서 젖은 몸을 말리는 운동복들이 먼저 눈에 띈다. 지난 저녁 흠뻑 땀을 먹었을 운동복들은 이 오래되고 작은 공간이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넌지시 말을 건넨다. 70~80년대를 건너온 사람이라면 귀에 익숙한 권투의 한 라운드를 알리는 공소리가 들린다.
저 날카롭게 들리는 금속성의 신호에 수많은 선수들이 의자를 박차고 상대를 향해 뛰어나갔으며 또 풀린 다리를 가누며 겨우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으리라. 문 옆 ‘한밭복싱훈련도장’이라고 쓰여 있는 나무 간판 너머로 작은 링이 보이고 딱 링만 한 마루 바닥이 깨끗이 치워져있다.
마루의 한 구석‚ 가로세로 1m 정도 사무실로 쓰는 공간에서 이수남 관장이 걸어 나온다. 오후 1시‚ 운동하는 이들을 기다리기에는 아직 긴 시간이 남은 때이지만 자동으로 울리는 공소리와 함께 오롯이 체육관을 지키고 있었다.
창고에서 시작한 역사
한밭권투체육관의 역사는 바로 관장 이수남 씨의 역사라고 할 수밖에 없다. 개관 4년 후인 1965년‚ 선수생활을 접으면서부터 체육관의 관장으로서 선수들을 지도하는 일이 바로 인생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기억 외에는 별다른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1961년입니다. 처음 체육관이 문을 연 때가.”
자그마한 체구에 다부진 인상이지만 선하게 웃는 이수남 관장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동안이었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한밭권투체육관의 역사를 풀어놓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61년 무렵은 한국 땅에 사는 모든 이가 헐벗고 굶주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절이었다. 거리는 몸 누일 곳‚ 먹을 것 없이 떠도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더욱이 아이들은 말도 못할 정도로 비참했다.
“길거리는 폐지 줍는 아이‚ 거지‚ 구두닦이‚ 껌 파는 아이‚ 뭐든 훔쳐서 파는 아이들로 말도 못할 지경이었어요.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군사정권이던 그 시절‚ 충남도지사는 대령 계급의 군인이었다. 한밭권투체육관의 초대 관장이었던 박찬규 씨와 도지사는 친분을 가진 사이었다고 한다. 그때 두 사람은 길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을 모아 운동이라도 가르치자고 의견을 모았다. 아이들도 선도하고 거리도 정화해보자는 차원이었다.
지금 한밭권투체육관 자리는 당시 시청에 딸린 부속 창고였다. 도지사는 시와 협의해 급한 대로 창고로 쓰던 건물을 내어주었고 거기서 일단 아이들을 모아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링은커녕 아무런 운동기구도 없었다. 코치도 체계적인 훈련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저 창고의 맨 바닥에서 뛰면서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일이 전부였다.
“물도 모두 길어다 먹었죠. 그걸로 씻고.”
지금은 대형 건물로 막힌 체육관의 한쪽 벽과 붙어 있는 쪽이 예전에는 보건소가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커다란 굴뚝이 있었는데 거기서는 연신 시신을 태우는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상황을 따질 환경이 아니었다. 못 먹는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에 뭐라도 조금 생기면 솥을 걸고 끓여 같이 나눠먹으며‚ 그렇게 아이들을 돌보는 장소였다.
“돈요? 아이들 가르친다고 해서 보수? 이런 거 하나도 없었어요. 그냥 운동하면서 가르친 거죠.”
꿈이 자라는 마룻바닥
살아남는 것이 꿈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운동을 시작하면서 많은 이들이 같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챔피언!
“‘헝그리 복서’라는 말 아시죠? 그 말도 우리 체육관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모두가 배고픈 아이들이었잖아요. 이를 악물고 운동했죠. 그때부터 모두 오로지 권투를 해서 세계 챔피언이 되어 성공하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습니다.”
이수남 관장의 인생도 그 꿈으로 버텨온 힘든 여정이었다. 마산에서 태어난 이 관장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혼자 두 아들을 키우던 어머니와 함께 마산의 사글세방은 안 다닌 곳이 없었다. 무려 80여 번이 넘게 이사를 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대전으로 이사와 보문중학교를 다니면서 권투를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한겨울에도 내복이 뭔지도 모르고 권투에 온 정열을 바쳤다.
“내복이라는 게 있는지 모르고 살았어요. 결혼해서 부인이 사준 내복을 보고 겨울내복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요.”
이렇게 권투로 성장한 이수남 관장은 1965년‚ 한밭권투체육관의 두 번째 관장 자리를 맡기 전까지 촉망받는 플라이급 선수였다. 동경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가 세 차례에 걸친 선발전을 모두 통과하고 마지막 4차 선발전에서 조동기 선수와 맞붙었다.
“선수면 누구나 그렇지만 나도 동경올림픽에 대단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죠. 꼭 나가고 싶었고 꼭 이기고 싶었어요.”
그러나 그는 아깝게 졌다. 그때 그가 받았을 낙담만큼이나 깊이 찢어진 눈의 상처는 아직도 남아있다.
“나는 굉장히 초라해졌어요.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고‚ 그러다가 이제 아이들을 한번 키워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가 1965년입니다. 이후 체육관이 조금씩 틀을 갖춰가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시작했던 일이 지금까지도 있으니‚ 제 청춘‚ 아니 인생을 다 바친 거죠.”
문득 이수남 관장이 동경올림픽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뒀다면 지금의 한밭체육관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일 오래되고 제일 많은
세월은 그렇게 조용히 흐른다. 권투를 배우겠다고 찾아온 아이들이 워낙 많기도 했지만 권투를 향한 정열 또한 뜨거웠다.
이수남 관장이 한밭권투체육관을 맡은 후로 점점 좋은 선수들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5년 정도 지나면서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많은 선수들이 전국대회에서 입상하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수남 관장이 슬쩍 들어 보인 자부심은 이렇다.
“우리 체육관은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체육관이자 제일 많은 선수들을 길러낸 체육관이기도 합니다. 기록이 다 있어요.”
그와 함께 운동했던 제자들만 해도 1만 5천 명에 이른다.
46년전‚ 제 50회 전국체전에서의 일이다. 충남의 대표선수를 선발하는 대회에 많은 체육관이 참가했다. 모두 최고의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었지만 한밭권투체육관은 11명이 출전해 11명 모두가 충남대표로 선발되었다. 그리고 전국체전에서 권투부분 종합1위를 차지했다.
“지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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