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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임금 초상 英祖御眞
- 저작물명
- 영조임금 초상 英祖御眞
- 저작(권)자
-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 출처
- 공표년도
- 창작년도
- 분류(장르)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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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정보
- 소장품 상세설명 영조(재위 1724~1776년)는 21세 되던 해부터 매 10년 마다 자신의 초상인 어진(임금의 초상)을 그려 그 수가 소본小本과 초본草本을 합하여 총 12본에 이르렀으며‚ 이들 어진은 영희전永禧殿‚ 선원전璿源殿‚ 강화의 만녕전萬寧殿 및 생모의 사당인 육상궁毓祥宮 등에 봉안되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영조어진은 이 유물과 21세 때 연잉군延?君 시절의 모습을 그린 <연잉군 초상> 두 점이 전부이다. 이 어진은 1900년 창덕궁 선원전에 모셨던 영조어진이 화재로 소실되자 육상궁 냉천정冷泉亭에 있는 51세 상(1744년 작)을 본떠 그린 것으로‚ 당시 주관화사는 채용신蔡龍臣(1850~1941)과 조석진 趙錫晉(1853~1920년) 등이 맡았다.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 “영조대왕의 어진이다. 광무 4년 경자년(1900)에 다시 베껴 그렸다. 英祖??御眞 光武四年 庚子移摹”란 표제가 붙어 있어 제작시기를 알 수 있다. 어진의 모습은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곤룡포袞龍袍를 입고서 두 손을 마주잡은 채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반신상이다. 익선관의 형태가 높고 곤룡포의 깃이 많이 패였으며 소매 폭이 넓고 옥대?帶가 흉배 위로 올라와 있는 등 조선후기 변화된 의복의 모습을 반영해준다. <영조어진>은 전신 배채(색을 곱게 보이기 위해 비단 뒤에서 채색을 가하여 앞으로 배어나오게 하는 기법)를 실시하여 단아하면서도 세련된 효과를 얻을 수 있었으며 왕의 기품과 위엄을 드러낼 수 있었다. 비록 이모본이지만 현존하는 어진이 희소한 상황에서 당대의 일류화가가 원본을 충실히 임모하여 그린 것으로 조선시대 어진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보존처리 전>
- 저작물 파일 유형
- 저작물 속성
- 1 차 저작물
- 공동저작자
- 1유형
- 수집연계 URL
- http://www.gogung.go.kr
- 분류(장르)
- 사진
- 원문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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