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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독립운동가 도암(島菴) 신태식(申泰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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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2013년 1월 독립운동가 도암(島菴) 신태식(申泰植)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2013년 1월 독립운동가 도암(島菴) 신태식(申泰植) 공적개요 성 명 : 도암(島菴) 신태식(申泰植)‚ 문경 생몰연도 : 1864~1932 주요공적 - 1902년 통훈대부 중추원 의관 역임 - 1907년 단양 의병모집‚ 도대장 취임 - 1919년 경상도 방면‚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운 훈 격 : 건국훈장 독립장(1968년) 공적요약서 공적상세설명 포토갤러리 공적요약서 신태식(1864.11.22~1932.1.15)은 문경 가은 출신이다. 초명은 철회(哲會)‚ 자는 열경(?卿)‚ 호는 도암(島菴)이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신철회(申哲會)가 있다.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민지리 186번지이다. 그가 격동의 역사 속으로 뛰어든 것은 1895년이다. 그해 단발령이 있자 신태식은 의병항쟁에 나섰다. 의병 소모과정에서 밀정 혐의가 있는 문경 가은(加?)의 김골패(金骨牌)와 상주(尙州)에 사는 강용이(?龍伊) 등을 농암(籠岩)장터에서 처단하였다. 1902년에는 내부주사(內部主事)와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을 지냈다. 그 뒤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광무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던 1907년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8월 3일 단양에서 의병 수백 명을 모아 도대장에 취임하였다. 이어 울진·평해·영양·영덕·영월·제천·원주·홍천·철원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또 이강년의진에 합류하여 소모후군장(召募後軍將)을 맡기도 하였다. 1908년 9월 홍주전투에서 물러나 횡성으로 퇴각할 때 총탄에 맞아 어깨에 부상을 입었으나‚ 양주(楊州) 산안전투(山安戰鬪)에 참전하여 일본군 나가사부로[長三郞]를 사로잡아 총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2월 14일 영평 이동(裡?)전투에서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는 1909년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상고한 그는 10년으로 감형되었다. 1918년 1월에 출옥한 신태식은 조선독립운동후원 의용단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1920년대 비밀결사 가운데 대표적인 조직으로‚ 주요 활동은 군자금을 모집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서로군정서는 1919년 11월 만주에서 만들어진 단체로‚ 군자금 모집·무장활동·선전활동 등을 활발하게 펼친 단체이다. 서로군정서에는 경북인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의용단이 바로 이 단체를 후원하고 나선 것이다. 의용단은 1920년 9월에 결성되어 1922년 12월까지 활동하였다. 그 결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맡은 사람은 신태식(申泰植)을 비롯한 김찬규(金燦?)·이응수(李應?)이다. 신태식은 경북단장을‚ 김찬규는 경남단장을‚ 이응수는 경북총무를 각각 맡기로 하였다. 구성원은 대부분 경상도 특히 경북지역의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신태식은 경상북도 단장을 맡아 동지규합 및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듬해 겨울 일제 경찰에게 그 기밀이 드러나 단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신태식은 1922년 12월 대구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23년 12월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1924년 6월 출옥 뒤에도 신태식은 항일투쟁을 이어가다 1932년 69세로 서거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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