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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독립운동가 성암(?菴) 장윤덕(張胤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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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2012년 7월 독립운동가 성암(?菴) 장윤덕(張胤德)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2012년 7월 독립운동가 성암(?菴) 장윤덕(張胤德) 공적개요 성 명 : 성암(?菴) 장윤덕(張胤德)‚ 예천 생몰연도 : 1872~1907 주요공적 - 1907년 이토오히로부미 등 매국대신 처단 시도 - 1907년 의병대장으로 활약 - 1907년 일경분파소 등 경찰대‚ 수비대 격퇴 훈 격 : 건국훈장 독립장 공적요약서 공적상세설명 포토갤러리 공적요약서 성암 장윤덕은 예천이 낳은 한말 의병장이었다. 그의 본관은 단양‚ 자는 원숙(元淡)‚ 호는 성암(?菴)이며‚ 1872년 7월 6일 예천읍 노상리에서 장재안(張載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배워 예천군 수서기(首書記)를 지냈다. 1905년 12월‚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상실될 위기에 이르자‚ 이에 비분 강개하여 국민들에게 항일 구국 정신을 고취시키고‚ 친일 반역 행위를 엄단하겠다는 경고로써 민중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 후 1907년 4월에 분연히 일어나 일제의 침략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비롯한 매국대신들을 처단코자 서울로 올라갔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실패하고‚ 고향으로 내려와서 재기를 꾀하였다. 1907년 4월‚ 의병대장 이강년(李康 )이 의병을 일으키자 장윤덕도 7월에 격문을 각지에 발송하고 3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진을 편성‚ 이강년 의병과 합세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주로 풍기(豊基)‚ 봉화(?化)‚ 문경(聞慶)‚ 용궁(龍宮)‚ 예천(醴泉)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7월 9일에는 일본경찰대와 교전하여 일본인 보조원(補助員) 3명과 한인 순검 2명을 사살하였다. 그해 8월 27일 의병 300여 명을 인솔하고 풍기 일경분파소를 습격하여 1명을 사살하고 31일에는 봉화분파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불태웠다. 1907년 9월 3일 문경읍을 공격하여 일본인 2명을 사살하고 일본인의 가옥을 불태웠으며‚ 동월 10일에는 이강년(李康秊)‚ 민긍호(閔肯鎬) 등의 의진과 합세하여 1‚0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문경 갈평리(葛坪里)에서 일경 나가타니(永谷) 경시(警視)와 미하라 (三原) 소위(少尉)가 인솔한 경찰대 및 수비대와 격전하여 일본군 3명과 한인 순검 2명을 사살하고 적을 격퇴시켰다. 9월 12일‚ 예천읍 공격에 이어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대구수비대를 격파하고자 상주읍(尙州邑)을 공격하여 일본인 자위단(自衛團)과 교전하던 중‚ 대구수비대에서 출동한 다나카(田中) 대위의 1개 중대와 격전을 벌였으나 패하면서 장윤덕 의병장은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이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 혀를 끊고 함구로 저항하다가‚ 1907년 9월 16일 상주군 함창면(咸昌面) 구향리(舊鄕里) 뒷산에서 총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표창‚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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