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어문

견훤

추천0 조회수 313 다운로드 수 1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견훤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견훤 활동시기 : 통일신라시대 본 관 : 완산 상세설명 본래의 성은 이씨이고‚ 본관은 완산(完山)으로 현재의 문경군 가은읍 갈전리에서‚ 신라의 장군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아자개는 농사로써 생활하다가 뒤에 가세를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견훤이 어릴 때 부친은 밭을 갈고 그 모친이 식사를 가져와서 일을 돕느라고 나무 아래에 눕혀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임으로 마을 사람들은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았다. 장성할수록 기골이 장대하고 기운이 뛰어 났으며‚ 지혜가 많아 군대에 들어가 전공이 있어 서남해변을 방비하는 비장이 되었다. 이때 신라는 국운이 쇠미하여 도적이 떼를 지어 도처에서 일어났으며‚ 견훤도 892년(진성여왕 6년)에 이를 틈타 반기를 들고 군사를 일으켜 무진주(光州)를 얻고 다시 완산주(全州)를 얻어 주민의 환영속에 900년(효공왕 4년)에 완산에 도읍을 정하여 자기의 거병한 목적은 옛 백제 의자왕의 숙원을 풀어주려 함에 있다고 하며 지방민의 화고적 감정에 맞게 국호를 후백제(後百濟)라 하였다. 후백제는 중국의 오월과 국교를 맺는 한편 북원의 양길을 달래고 후고구려 궁예를 치며 신라의 대야성을 비롯한 10여성을 빼앗았다. 918년(경명왕 2년)에 왕건(?建)이 고려를 건국하자 유대를 가지려고 하례까지 하였으나‚ 920년에 대야성을 공격하고 진례성(茂朱)으로 진격할 때‚ 신라는 왕건에게 구원을 청하여 도움을 얻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후백제와 고려는 사이가 나빠지고 신라와 고려는 친밀하게 되었다. 견훤은 먼저 신라를 정복하여 지난날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짓밟아 왕을 욕보이던 분풀이를 할 셈으로 대병을 이끌고 상주를 불사르고 영천을 거쳐 927년(경애왕 4년)10월에 신라를 쳐서 당시 포석정에서 연회중이던 경애왕을 공격하여 자살케 하고 김부(金傳)를 경순왕으로 세우는 등 한때는 후삼국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졌다. 이때 견훤은 경애왕의 왕제 및 재상과 역대의 진귀한 보물 및 병장(兵仗) 자녀(子?) 백공(百工)을 취하여 돌아오다가 경애왕의 요청을 받은 왕건이 신라를 구원하려고 정병 5천명을 거느리고 달려오다 공산(팔공산)에서 만나 동수(대구)에서 크게 싸웠으나 고려 태조 왕건은 견훤의 군사에게 포위되어 심히 위급하게 되었다. 이때 고려 대장 신숭겸의 모습이 왕건과 비슷하므로 왕건의 수레를 타고 위장케하여 달아나게 하여 신숭겸과 김락장군 등을 잃고 왕건은 병졸로 위장하여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 다음해인 928년 강주(진주)를 습격하고 또한 929년에는 의성부를 공격하여 성주인 홍술(?術)을 전사시키니 왕건은 "나의 좌우 팔을 잃었다"하며 슬퍼하였다. 이렇듯 전략에 밝은 견훤도 후삼국 통일의 성취를 눈앞에 두고 도리어 어두운 그림자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니‚ 이는 가족들의 불화로 십여명의 아들 가운데 키가 크고 지혜가 많은 넷째 아들인 금강을 특히 사랑하여 장차 그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고 하자 맏아들 신검이 반대하고 두 아우 양검‚ 용검은 이를 알고 근심과 고민으로 지냈다. 이때 견훤은 양검을 강주(진주) 도독으로‚ 용검을 무주(광주)도독으로 삼으니 신검은 고민하다가 이찬‚ 능환으로 하여금 사람을 강주와 무주에 보내어 두 아우와 음모를 꾸며 935년(신라 경순왕 9년) 3월 파진찬‚ 신덕‚ 영순 등은 신검에게 권하여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하고 사람을 시켜 금강을 죽인 다음 신검은 스스로 대왕이라 칭하였다. 935년 6월 견훤은 30여인의 간수에 의해 지켜졌으나 이들에게 술을 대접하여 취하게 떨어지게 한 다음 막내 아들 능예와 함께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 지배하에 있던 나주로 가서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왕건은 유금필을 보내어 맞았으며 왕건은 견훤의 나이가 10년 위라고 상부라고 존칭하며 남궁을 주어 머무르게 하였는데 그 벼슬은 백관의 윗자리에 두고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935년 신라가 왕건에게 항복하고 936년 2월 견훤의 사위이며 후백제의 장군인 박영규가 사람을 거느리고 선산부근에서 격파하고 황산(連山)까지 추격하니 신검이 항복하여 936년 후백제는 나라를 세운지 2대 45년만에 멸망하였다. 견훤은 왕건이 능환의 목을 베어 죽였으나 신검은 죽이지 않자 울화가 치밀어 그해에 등창을 앓다가 9월 8일 황산사에서 죽었다. 그때 그의 나이 70세로 지금 충남 논산군 연무읍 금곡리 제총산 언덕 위에 있는 무덤이 후백제 왕 견훤의 무덤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견훤이 죽을 때 유언하기를 죽은 전주의 모악산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고 했는데 견훤의 능이라 하는 이곳에서 보면 전주 남쪽에 있는 모악산이 잘 바라보인다고 한다. 우리 고장에 견훤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농암의 견훤성과 견훤 왕궁지가 있으며 출생과 얽힌 금하굴이 가은읍 갈전리에 있기도 하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