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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고유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고유 호 : 순지/추담 활동시기 : 조선시대 본 관 : 개성 출생시기 : 1722년(경종 2년) 상세설명 본관은 개성이요‚ 자는 순지(順之)이고 호는 추담(秋潭)이며 월봉 인계의 후손으로 1722년(경종 2년)에 태어났다. 조선조 영조때 명관으로써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니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있을 때는 인자한 정치를 하여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이름 대신 고창녕으로 불릴만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재주가 뛰어나 나이 16세에 향시에서 장원을 하고 20세에 진사에 합격하였으며 1743년(영조 18년) 21세에 영조 임금이 친히 과장(科場)에 임하여 실시한 친시(親試)에서 영조 임금이 다수의 응시자 중에서 한 사람이 용모와 거지(擧止)가 단정함으로 지적하여 기이하게 여겼더니 그가 등제 돼 입시하매 임금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아! 과연 그 사람이로다]하고 칭찬하였다. 뒤에 사관으로 입시할 때 임금이 하교하기를 [그는 소년 등제하여 문학이 이 같으니 가히 진급제라 하겠도다]하였고 또 병조좌랑이 되어 입시할 때 임금이 하교하여 이르기를 [그 사람됨이 심히 견학(堅學)하니 내가 한번 쓰고자 하더니 이제 등과한 지 10여년 이로다]하고 그가 과거에 급제한 수귀(水龜)를 애칭하였다. 양사(兩司)의 필선(弼善)을 거쳐 승지(承旨)에까지 이르러 1779년(정조 3년)에 세상을 떠났다. 경상도사로 있을 때 관찰사 윤동도가 그에게 전지에 대한 모든 일을 일절 위임하니 송사가 책상 위에 와서 가득하게 쌓여도 처리함이 바르고 빨라 관찰사가 크게 경탄하였다. 또 창녕현감으로 있을 때 조엄이 창녕에 조창을 신설하려고 할 때 민폐가 클 것을 염려하며 힘껏 말렸으나 듣지 않으므로 그는 조정에 글을 올려 윤허를 얻어 가지고 건축토록 하니 읍민들이 크게 힘 입었다고 하여 칭송이 대단하였다. 평안북도 안주의 뽕밭은 옛 적에 오리 이원익이 목사로 있을 때 식수하였으나 그 뒤 관리가 엉망이었으나 그가 다시 복구를 하고 잠업을 크게 권장하여 안주항라(安州亢羅)가 명산물로 이때 일어나게 되었고 또한 실제로 있지않는 가구 8천호를 감하여 줄 것을 상보(上報)하여 세금을 격감하니 백성들은 전(前)에는 이공(泥工 : 이원익)이 있고 이제는 고공(高公 : 고유)가 있다고 칭송하였으며 그가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오려고 할 때는 읍민이 수십리를 따라와 수레를 돌려 주아로 모셔가는등 이렇게 세 번이나 말렸으나 그의 사정이 부득이 함을 알고 글의 경계까지 따라와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며 존경하였다. 성리와 경학에 깊어 어떠한 경연에서의 물음에도 대답 못함이 없었고 외국어에도 능하니 청나라 사신과 일본 사신을 대접하기도 하였다. 이에 임금이 탄식하기를 [아! 이 사람도 늙었도다. 내 이사람을 안 지 어언 50여년 이로다]하였다. 그의 이야기로는 산승 남붕이 재물이 많고 권세가 있다하여 법을 어기는등 방자하여 이를 하옥시켜 죄를 벌주려 하였는데 당시 상위(相位)에 있는 사람이 글을 보내어 석방하기를 구(求)하였고 또 관찰사들이 백계(百計)로 구하기를 꾀하였으나 그는 이에 구애받지 않고 죄를 엄히 다스렸다. 또 어떤 백성이 사람에게 재물을 받고 자기의 딸을 주어 출가하였더니 남편된 자가 심히 멸시하므로 드디어 암살하고 증거를 없애 버렸다. 이에 시일이 흘러도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그가 조사하여 처결하였다. 경남 초계 지방에 염씨 부인이 무고를 이어 관장에게 제소하였는데 내용인즉 사령이 그 실정을 자세히 조사치 않고 축출을 명하고 그의 손목을 잡아 끌어내자 염씨 부인은 분함을 참지 못하여 말하기를 [여자의 손목을 타인에게 잡히고 이 손을 두어 무엇에 쓰리오]하고 손목을 끊고 자살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고유를 조사관으로 명하여 사건을 심리하라고 하였다. 이때 관찰사가 말하기를 이 계집의 죽음은 정절이 아니라 하였으나 그는 정색하여 말하기를 [여자로서 사람에게 손을 잡히고 굴욕됨을 수치로 생각하여 자살하였거늘 정절이 아니고 무엇이리오. 그대의 말 갈으면 백성에게 권장 교도할 필요가 없으리도다]하니 관찰사가 깨닫고 마침내 사실과 같이 상고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아첨하는 것은 선비가 부끄러이 여기는 것이오. 얻고 얻지 못하는 것은 명이로다]하였고‚ 일찍이 자기의 땅을 어느 사람이 몰래 팔아먹은지라 그는 그 땅 문서를 불살라 버리고 그 사람을 전과 다름없이 대접하였다. 저서로는 문집이 있고 영순면 김용리에 있는 죽곡사에 입향하여 제사를 올리고 지금까지도 촌로들은 그의 행적을 얘기하며 추모하고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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