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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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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권중화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권중화 호 : 용부/동고 활동시기 : 고려시대 본 관 : 안동 상세설명 4세기(고려말 조선초)의 학자‚ 문신‚ 본관은 안동 도첨의 정승 한공의 아들이다. 1353년(공인왕 2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언을 거쳐 지신사로 전선을 받아 보고 우왕때 정당문학이 되고 이어 문하찬성사에 이르렀다. 1390년(공양왕 2년) 이초의 옥(?)(1390년 5월 윤 이와 이 초가 반란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어 나와 곧 풀려 나와 다시 문하찬성사 상의찬성사를 역임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판문하부사에 올랐고 1394년(태조 3년) 2월 "동국역대제현비록촬요"를 편찬했다. 1396년(태조5년) 명나라가 조선조에서 세공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고 정성을 다한 것이므로 더는 바칠 수 없다고 조리 정연하게 진술하여 명나라 황제 태조로 하여금 감복케 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진정한 사신이란 칭찬과 함께 현재대로가 마땅한 세곡이라고 확약을 받아 왔으니 조선 건국 초의 안정되지 못한 민심과 경제 사정으로 보아 공이 아니었던들 백성은 더 많은 세금에 허덕여 도탄에 빠졌을 것이요 국가 재정은 파탄에 이르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일상생활에도 근검· 청렴하고 사물의 판단에 조리가 분명하여 세상의 추앙을 받았으니 진실로 당대의 난국을 타개한 명재상이다. 1407년(태종 7년)에 영의정이 되고 이어 예천백에 봉해진 뒤 치사했다. 그는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고 초연했으며 또 의학· 지리· 복서에도 통달했으며 글씨에도 능하여 전서 팔품체를 잘 썼다. 그의 작품으로는 지금도 「 창암사 나옹화상비 」「 광통보제사비의 전액 」이 남아 있다. 더욱 고사에 밝아 치사 후에도 조선조의 기틀을 다지는 정치의 고문격으로 활약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요 87세를 일기로 정치의 거목은 쓰러졌다. 그는 덕달리(德達里-지금의 예천국 유천면 서평동)에서 태어나고 고려와 조선을 통해 이들 가문이 번창하여 마을 이름도 덕달리라 일컫게 되었으며 그의 행적은 나라를 빛낸 공이 커 600년이 지난 지금에도 큰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 태조 태종실록‚ 국조인물고‚ 조선불 교통사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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