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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김관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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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김관묵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김관묵 활동시기 : 근대이후 상세설명 1918년 11월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강화 회의의 기초 조건으로 14개조의 원칙을 발표하였을 때 이 가운데 민족자결을 주장하는 조항이 있어 세계 약소 민족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식민지정책에 시달린지 10년째로 접어들면서 그간 우리 민족의 착취와 탄압으로 대일 감정이 악화되고 민족적인 자아의식이 싹텄다. 이러한 가운데 1919년 1월 22일 고종황제의 갑작스러운 의문의 죽음은 군내 민심을 크게 충격받게 하였다. 또한 1919년 2월 8일 일본 유학생이 동경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宣言書)와 결의문(決議文)을 발표함으로써 국내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인사에게 큰 자극이 되어 3· 1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구미시 고아면 원호동 들성에서 출생한 김관묵지사는 뜻한 바 있어 1915년 20세에 잠시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로 이거(移居)하여 그곳 주민에게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애국동지를 규합하였다. 3· 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의 의거를 높일 것을 의논하여 거사를 3월 20일 가조면 장기리(加祚面 場基里) 시장일(市場日로) 약속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오후 2시 30분 독립만세 하고 쓴 기차를 장기리 만학정 앞에 세운후 독립만세를 높이 부른 다음 거창읍으로 향하여 시위행열이 살피재에 이르렀을 때 일분군 헌병들을 향하여 돌진하니 이때 일본 헌병들이 충격을 가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이 사건의 주동자로 체포 구속되어 손톱 발톱을 뽑히는 모진 고문을 겪은 다음 거창지방 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죄명으로 1년 6월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82년 8월 15일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자주독립에 헌신 노력한 공적으로 대통령 표창(54994호)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3·1운동실록‚ 거창군지 경상남도 경찰부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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