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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면(金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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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김면(金沔)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김면(金沔) 호 : 송암(松庵) 활동시기 : 조선시대 본 관 : 고령 출생시기 : 1541 출 생 지 : 1541 시대 : 조선시대 상세설명 고령인 김면선생은 1541년(중종 36년) 4월 2일 고령군 개진면 양전동에서 부사 세문(世文)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지해(志涇)이고 호는 송암(松菴)이라 하였다. '沔'이란 물이 유만(流滿)하여 가득 해짐을 이름이며 지해는 작은 냇물이 흘러 큰 바다를 이룬다는 뜻이니 선생이야말로 결코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날마다 새로운 지식을 주입시켜 바다와 같은 무한한 이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여 이상과 현실이 혼연일체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 선생의 생활철학이었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총명함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학문을 배우는 일에 비상한 재주를 가져 일곱 살 때에는 벌써 소학을 배웠고 여덟 살 때에는 대학을 배워 큰 뜻을 이행하게 되었다. 선생이 아홉 살 되던 11월에 중용을 완전히 이해하였으며 열살 때에는 대암(?庵) 박성(朴?)과 매일같이 양전 관동정(寬?亭)에서 공부에만 열중하였을 뿐만 아니라 열한살 되던 2월에는 퇴계문인인 동강 김우옹선생을 찾아가서 희경(羲經) 한질을 책의 첫머리부터 끝까지 단번에 외웠다. 그 해 즉 1551년(명종 6년) 11월에는 비로소 동강과 같이 퇴계선생을 찾아 뵈옵고 대학연의(?學衍義)를 배웠다. 선생은 열 다섯 살때에 상평록일기(常平錄日記)를 저술했으며‚ 그 외의 저술로는 삼강략(三綱略) 2권‚ 심유지(心遺誌) 3권‚ 역리지(易理誌) 3권 그리고 봉선의(?先儀) 2권‚ 율례지(율례지) 2권과 시문집 약간 등을 저술했으나 임진왜란 이후 정인홍(鄭仁弘)이 수사관으로 있으면서 아깝게도 모두 거두어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1577년(명종 12년) 5월 선생은 열 일곱살에 전주이씨 부호군 황(煌)의 딸과 결혼했다. 그때부터 선생은 성리학을 연구하여 후진을 가르치니 그 문하에 많은 학도들이 모여들었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곧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고 선조가 즉위하여 유현을 널리 구하였을 때 월천 조목(月川 趙穆)‚ 우계 성혼(牛溪 成渾)‚ 한강 정구(寒岡 鄭逑) 등과 함께 추천되어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처음부터 관직에 뜻이 없었던 그는 사퇴하였다. 1577년(선조 10년) 선생이 설흔 일곱 살 되던 해 2월에 갑자기 모친이 중병에 들어 크게 고통을 당했다. 평소 효심이 지극한 선생은 모친의 완쾌를 위하여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 하늘을 향해 기도할 때였다. 갑자기 저 공중에서 그 무엇인가 땅에 떨어지지 않는가. 지극한 선생의 효심에 하늘이 돌보아 독수리가 산토끼 한 마리를 물어다 떨어뜨린 것이다. 선생은 즉시 산토끼를 고와서 모친에게 드렸더니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모친의 병은 점점 나아 완쾌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군이 패산하고 국가가 위기에 빠진 것을 본 선생은 용감히 일어나서 의병 항쟁을 벌였다. 선생은 그해 5월 11일 향리인 고령군 개진면 양전동에서 병든 몸으로 가동(家 )과 같이 마을 사람 700여명을 이끌고 창의(倡義)하기를 호소한 즉 이에 호응하여 사방에서 의병들이 앞을 다투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선생은 조종도(趙宗道)‚ 문위(文緯) 등과 거창(居昌)‚ 고령(高靈) 등지에서 의병(義兵)들을 규합하여 금산(金山)‚ 개령(開寧) 간에 주둔한 10만 여명의 왜군과 대치하였다. 무계전투에서 승리한 후 조정에서는 6월에 선생을 합천 군수로 제수하고 교서를 내려 유시하였고 역시 그해 11월 26일에는 의병도 대장으로 제수 하는 교서를 내렸다. 의병 대장이 된 송암선생은 군사 4‚000여명을 이끌고 당시 주성인 대장산성(현 고령군 우곡면 도진동 의병성지)과 또한 무계산성(현 고령군 성산면 무계동)에다 집결시켰다. 드디어 왜전선 두척을 만나 접전 끝에 전선 두척을 불사르고 왜병 1‚600여명을 사살한 큰 전과를 거두었으니 이것이 유명한 개산포 대첩이다. 한편 서부경남과 호남지방의 진입로가 막힌 왜적은 험한 길을 따라 남하 하다가 송암 선생이 이끄는 아군을 만나 격전 끝에 왜적은 전멸을 당했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우척현대첩(牛脊峴?捷)이다. 이 외에도 두곡역전의 격전(豆谷은 쌍림고곡) 그리고 사랑암대첩(沙郞岩?捷) 진주원병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의병 세력간의 불화 해소에도 힘썼다. 의병활동 당시 곽재우 장군이 “영남을 보존할 분은 이 분 뿐이다”하며 그의 인품에 탄복하였다 하며‚ 1593년(선조 26년) 선산의 왜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금릉군 하리 진중에서 진두 지휘중 피곤과 과로에 쌓인 선생은 불행하게도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그해 3월 11일 '지지유국 부지유신](只知有國 不知有身)'이란 말과 더불어 '나의 죽음을 밝히지도 말고 슬퍼하지도 말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는 기병한 이래로 몇 달 동안이나 갑옷을 벗지 않았다. 큰 전투를 무려 10여 차례나 했고 적을 물리치기를 3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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