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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김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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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김수길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김수길 활동시기 : 근대이후 상세설명 김수길(金壽吉)은 김천시 증산면 금곡리에 살면서 대구 계성 학교에 재학중인 19세(1919년 당시)의 청소년이었다. 김수길은 1919년 3월 8일 대구시내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9일에 김천으로 와서 황금동교회에서 김충한(金忠漢)등 과 만나 11일을 기하여 시위운동을 거행키로 의논하였다. 거행 때 배포한 경고문을 김충현과 함께 작성하여 이를 인쇄했다. 김천에서의 시위운동이 실패하자 그는 대구로 돌아가 4월 2일에 "동정표시 경고문"을 시내에 뿌려 모든 상점을 폐쇠하고 일본 사람에게 물건을 파지 말도록 했고‚ 다음날에는 문을 연 상점에 폐점을 촉구하는 서한을 냈다. 6일에는 대구경찰서장(白井義三郞)에게 만세 시위에 가담한 동포들의 검거를 중지하지 않으면 암살하겠다는 경고장을 보내는 한편 폐점을 촉구하는 경고문을 재차 배포하였고‚ 7일에는 외국 기자가 대구를 방문할 것이니 내일은 아침부터 폐점하여 조선인의 단결을 보이고 일본 사람에게 물건을 팔지 말라는 경고 문을 또다시 배포했다. 13일에는 친일파 박중양(朴重陽)등의 조직한 자제회(自制會)에 강제 입회시킴은 조선민족으로서 용서치 못할 일이며‚ 이를 주동한 매국노 박중양‚ 백응훈(白應勳)에게는 손을 떼라는 경고문을 우송하였다. 18일에는‚ 친일기관과 총독부 산하 전공무원은 모름지기 분기하여 횡포한 일본 기반을 벗어나‚ 학정하에서 노예적 대우를 받던 치욕을 씻고 자유개척과 독립의 기회를 타서 국가 재건에 노력할 수 있도록 용감하게 직장을 떠나라는 "동포에게 권고한다"는 전단을 배포하였다. 27일에는‚ "동포에게 경고한다"는 전단을 배포하였는데 그 전단에는 "세계대전은 자유를 위해 희생했다. 조선민족은 총궐기하여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 일본의 강압을 육탄으로 막자‚ 각 상점은 문을 닫고 일본놈과 거래를 끊으라'는 것이었다. 이렇듯 젊음을 독립운동에 불태우다가 일경에 적발되어 일심에서 2년 6월의 언도를 받았으나 검사의 부대공소로 대구고등법원에서 3년 징역형을 받아 복역하였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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