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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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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김수옹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김수옹 호 : 경화/기재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513년(중종 8년) 3월 17일 상세설명 경주인 김수옹선생은 1513년(중종 8년) 3월 17일 아버지 홍공과 어머니 진양정씨(진사 훤의 녀) 사이에 장남으로 월기촌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화이고 호는 기재이다. 선생의 7대조 장유공은 고려 판도판서이며 증조 직방공은 성균원생이였고 조부 숙문공과 아버지 홍공 역시 성균생원이어서 대대로 벼슬을 한 문중이다. 어려서부터 그 기질이 순수할 뿐만 아니라 재주가 뛰어나고 민첩하여 글공부할 때에 스스로 이해하고 깨달아 어렵고 깊은 뜻이 담긴 글이라도 잘 이해하고 해득하여 세인을 놀라게 하였다. 선생은 퇴계선생의 문하생으로써 성리학을 열심히 연구하니 퇴계선생 또한 그를 귀히 여기며 사랑하였고 그후로부터 경학에 전념하여 많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면서 전과정을 쉽게 마쳤다. 1536년(중종 31년)에 선생이 아버지를 뵈오려고 한양에 가니 태학관에 계시는데 마침 별과 과거가 있는지라 아버지의 권유로 과거를 보아 급제하니 그때 나이 24세였다. 이후로부터 그의 이름이 경향 각지에 널리 퍼졌으며 얼마 후 아버지를 뫼시고 고향인 고령으로 내려와 모산골에 정착하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 우애하기를 소학에 가르친 대로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병들어 눕게되니 의원을 부르고 정성껏 간호하였지만 위독하게 되자 선생의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워 잠시 소생시켰으나 끝내 돌아가시고 말았다. 처음에 선생은 연서 찰방으로 지내다가 그후 예안현감을 지내는 동안 공평하고 겸손하며 정직하게 정사를 다루니 관리와 백성 모두가 선생을 존경하였다. 그 후 경상도사‚ 평안평사와 이조정랑을 거치는 동안 이조가 선생을 욕선공보에 보 할려고 상신 하였드니 조정의 공론 역시 정당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명종원년 을사사화라는 큰 옥사가 있었다. 이때 선생과 백성들도 을사사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더이상 벼슬자리에 머물러 있을 마음이 없어서 벼슬을 그만두고 합천 숭산동 깊은 산골로 들어갔다. 선생은 한훤‚ 일두‚ 두현인을 생각하면서 허물어진 두 선생의 강학 지소를 보수하기 위하여 고령‚ 현풍‚ 합천‚ 초계‚ 삼가‚ 거창 등지를 다니면서 뜻을 전하고 기금을 모아 강학지소를 보수하고는 삼수정이란 기문을 붙였다. 그리고는 근방에 있는 동지 생도들을 모아 경적을 강습하고 또한 남전여씨향약지의라는 10여조 되는 향약으로 계를 만들어 생활화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선생은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즉 1559년(명종 14년) 4월 10일이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온 향중에 들려지자 모두가 슬픔에 잠겼으며 특히 향약 계원들을 위시한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생도들은 대성통곡하며 슬퍼하는 가운데 유해는 쌍림면 고곡동에 장례를 지냈다. 선생이야말로 겸손의 미덕을 가지면서도 용감했으며 특히 큰 절개를 가져 상대가 낮다고 결코 교만하지 아니했으며 세도가 있다고 아부하지 아니하는 대쪽같은 기질이었다. 선생의 부인은 이조참판 풍양인 우암 인규선생의 따님이었고 슬하에 2남 1녀가 있었다. 향림에서는 선생의 얼을 길이 후세에 전하며 추모하기 위하여 고령읍 지산동 47번지(지산못 뒷편)에 향림정을 건립하였으며 1848년에 중건하고 중건기문은 1851년에 전 병조참의 김상직이 지었다. 1899년 지산동 148번지(현장소)에 이건 하였으며 상량문은 전도사 이종기가 지었고 이건 기문은 춘추관 수찬사 이만도가 지었다. 전 향림정 자리에 유허비가 있는데 성산인 이기원이 비문을 지었다. 고곡동 묘소에는 통훈대부행 고령현감겸 상주진관 병마절제도위 민사응이 묘갈비명을 지었다. 그리고 고령군 우곡면 사촌동에 있는 영연서원에서 봉사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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