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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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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김시성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김시성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김시성의 자는 문원이고‚ 호는 금포이며 본은 청도이다. 돈용교위(정6품 무관의 품계)인 고조부 김충신이 한양에서 하양읍 남하동에 처음으로 이거하여 대대로 세거하였고‚ 김시성은 1602년(선조 35년) 4월 24일 만송 김사행의 5형제 중 장자로 태어났다. 임진란 때 하양의 의병장이었고 후에 인동부사를 지낸 신해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영특하니 조부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고 대여섯 살 때 이미 장차 거인이 될 그릇이 엿보였고 밖에서는 골목대장이어서 감히 다른 아이들이 맞서지 못할 정도이었다. 8세에 아버지를 따라 글을 배웠고 10세에 이웃 마을 은호동에 사는 아버지의 친구인 괴암 이간으로부터 수학하였다. 개구장이 골목대장이 일단 학문에 마음을 두자 밤낮 가리지 않고 글읽기에 골몰하였다. 15세에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손처눌에 수학할 때 한서(중국 역사책)를 읽다가 관우의 대목에 이르러서는 옷깃을 바로하여 충의로운 사람이라고 감탄하였고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대목에 와서는 책을 덮고서 입을 더럽힌다 하였던 바 손처눌이 내심 깊이 탄복하였다. 정구가 남하동 식송정을 방문할 때 배웠고‚ 그 후 17세 때는 유시번에게 배우고 다시 22세에 인동에 가서 여헌 장현광에게 중용을 배웠다. 이와 같이 오직 학문을 닦기에 부지런하였고 이름난 학자를 찾아 가름침을 받고 질의하였다. 27세에 모상‚ 30세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다시 부인을 여의기도 하여 복을 입었다. 그동안 후금 즉 청국이 우리의 북방을 늘 소란하게 하여 나라의 사정이 어수선하였는데 왕은 미쳐 강화도로 몽진할 겨를이 없이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그때 김시성이 35세이었다. 지방의 관군이 대거 북상하고 각지에서 창의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는데‚ 김시성도 분연히 붓을 던졌다. 평화시에는 문을 숭상할 것이지만‚ 나라가 위태로운 난세에는 오직 무로써 위국충정을 다할 것을 결의하였다. 김시성은 남한산성으로 달렸다. 얼마 후에 별과에 응시하여 무과에 올랐다. 조정에서는 김시성의 문무를 겸전한 재주를 기특하게 알았다. 화전 양론이 있었지만 대세는 청 태종과 손잡지 않을 수 없었다. 강화가 논의되고‚ 강화가 이룩되려면 왕세자 왕자가 인질로 청나라에 끌려가게 될 듯하니 왕세자를 호위할 무관을 선발하였다. 이른바 8장사를 특선하였는데 김시성이 우두머리로 뽑히었다. 8척의 큰 키에 용맹하였고 또한 학문을 겸비하였으니 적격이었다고 본 것이다. 이듬해(1637년) 정월에 남한산성의 성문을 열었다. 척화가 아니고 주화로 조정의 의논이 결정되었다. 2월에 김시성은 세자익위사의 익찬(정6품)에 특채되었다.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및 척화를 주장한 중신들이 인질로 청나라에 가게 되는데 종행하게 될 문관들을 특진시켜 세자시강원에 제수하였으나 겁을 먹은 문인 고관 대작이 모두 병을 핑계하여 북행하기를 꺼려 무신으로 바꾸게 하려는 꼴을 보자 김시성은 참을 수 없었다. "이 지경에 이르러 군주가 욕되면 신하가 죽어야 할 날이거늘 어찌하여 꾀병을 부리어 기피하려는고? 평시에 벼슬 좋아하는 그대들이 이같이 무신을 밀어주었던가"라고 크게 문신들을 꾸짖었다. 이렇게 해서 3년간을 청나라 심양에서 충의심과 분함 가운데 세자를 호위하였다. 청 태종이 봉림대군(효종)의 의엿한 모습과 적개심에 불타는 표정을 보고 해치고자 하여 사나운 말을 타고 달리기를 권했다. 대군이 김시성을 불러 말고삐를 잡게 하였다. 얼마를 달리지 못하였는데 그 사나운 말이 피를 토하고 즉사하였다. 말고비를 잡고 말을 몬 김시성이 그렇게 한 것이었다. 척화한 3학사이 끝내 심양에서 살해되자‚ 김시성이 애통하여 그 주검이라도 찾아서 고국에 보내고자 힘썼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니 분통을 억누르지 못하였다. 한편‚ 따라간 궁노 중에서 밖에 나가 오랑캐가 거래하는 자를 발견하고는 끌고 와서 곤장을 치고 다스리기도 하였고‚ 청 태종의 사절이 세자가 머무는 곳에 당도하여도 출영하여 절하는 이리 없었고‚ 소현세자가 노란 앵무새를 구하여 귀여워하자 김시성이 남의 나라 물건을 가까이 하지 말도록 간하였다. 이 동안에 봉림대군과 뜻이 통하여 청에서 받은 수모를 갚을 일에 묵묵히 뜻을 모았다. 38세에 세자와 대군을 모시고 고국에 돌아왔다. 인조께서 호종한 공을 치하하여 백은으로 된 말안장을 하사하였다. 그로부터 호분위 사과‚ 황주 판관‚ 43세 때 용천부사를 제수받았다. 지역 내에 범이 있어 사람을 해치는 일이 있자 몸소 범을 찾아 큰 활로 범 두마리를 죽였다. 이것이 감사에 의하여 조정에 알려지자 인조는 명주옷 한 벌을 하사하였고‚ 세자가 된 봉림이 치하하여 시 한 수를 내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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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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