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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김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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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김응생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김응생 호 : 덕수/명산 활동시기 : 조선시대 본 관 : 경주 출생시기 : 1516년(중종 병자년) 상세설명 선생의 자(字)는 덕수(德秀) 호(號)는 명산(明山)이요‚ 본관(本貫)은 경주이며‚ 1516년(중종 병자년)에 영천군 자양면 노항동에서 영능 참봉 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명종 4년에 진상에 뽑혔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고명하고 부모 모시는 효성이 지극하였으나 나이 열 세 살에 부친을 여의게 되어 영천군 자양면 용산동 기룡산밑 노적봉에 장사를 지낸 후 어린 나이로 무서움도 모르고 무던 아래 초막을 짓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묘살이를 계속하는데 밤이 되면 큰 호랑이가 나와서 초막옆에 엎드려 있다가는 날이 밝으면 간 곳이 없어졌다. 처음에는 오죽 무서웠을까? 그러나 밤마다 호랑이가 찾아주니 나중에는 호랑이가 오지 않으면 오히려 무서울 지경이었다. 묘 앞에 앉아 절을 한 자리에 눈물이 떨어져 풀이 마르고 흙이 파였다 하니 시묘하는 정성과 애통하는 효성에는 하늘이 감동한 듯 하다. 선생이 시묘하던 골짜기(자양면 용산동 노적봉밑)를 400년이 넘는 오늘날도 시묘골로 불리고 있다. 선생은 일찍이 퇴계 이황 선생의 문하에 수확하면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도학에 저력하면서 효는 백생의 근본임[孝白行之本]을 깨닫고 실행하니 퇴계 선생에게 많은 칭찬을 받았다. 1550년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노촌 정 윤향 선생과 같이 노항동에 십여간의 집을 짓고 자양서당이라 이름 붙이고 공부하는 사람들을 거처하게 하고 학문을 숭상하기로 하고 동네 가운데 서있는 은행나무 밑에 단을 모으고 공부하는 사람들로 상읍례(相揖禮)를 행하게 하고 예절을 익혀서 "효를 백행지본"이라 하는 사상을 고취시켜 후진 교육에 전력하면서 사사재물을 교육사업에 투자하였다. 이 때에 신령현감 황준영이 자양서당 낙성 잔치에 참석하여서 젊은 시절로부터 도학과 효행에만 뜻을 두어 후학에게 추앙을 받아왔음을 찬양하고 시(詩)와 자양 서당 기문(記文)을 지어서 그 사적을 현판에 남기니 지금도 그 시대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1553년 소암 노수(小庵盧遂)‚ 노촌 정윤량(魯村鄭允良)선생과 뜻을 같이하고 힘을 모아 우리 나라에서 서원 건립 사상 두 번째로 영천군 임고면 고천동 부래간밑에 임고서원을 창건하고 포은 정몽주(圃隱鄭?周)선생의 도학과 충절과 효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향사 지내기로 하고 퇴계선생께 그 규모와 절차를 문의하여 결정하고 많은 서적을 사서 서원 장서실에 두고 뜻 있는 학자들로 하여금 열람 탐구하게 하여 선대의 유풍을 일깨우니 당시는 물론 후세에 이르기까지 충효례의 유교사상을 한층 더 밝게 하였다. 조부상을 당하여도 부친상 때와 같았고 1559년 자양서당에 유림을 모아 향음례(鄕飮禮)를 행하고 효도에 관계되는 향약을 지어서 몸소 실천할 것을 권장하고 그 뜻을 강론하었으니 일평생 후진 학문에만 전력하고 1575년(선조 을해)에 일생을 마치었다. 아들 완(?)이 임진왜란시 원종공신 선무 훈공으로 통정 대부 호조참의(通政??戶曹參議)의 증직을 받았고 자양서당은 문화재에 지정되어 영천댐 관계로 임고면 삼매동에 이건되어 현재에도 선생의 고결한 정신을 풍기게 하고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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