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어문

김재열

추천0 조회수 101 다운로드 수 0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김재열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김재열 호 : /백농 활동시기 : 근대이후 상세설명 김녕인 김재열 선생은 1884년 5월 20일 고령군 운수면 법동에서 정환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호는 백농이다. 어려서부터 굳은 의지의 소유자였으며 도량이 넓고 재주 또한 뛰어나 한학에 조예가 깊을 뿐 아니라 애국심 또한 투철하였다. 그는 시대에 맞는 신문학을 배워 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나라의 충성된 일군이 되고자 곧 서울로 올라가 경신중학교를 거쳐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이래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날로 심하여 통분을 참을 수 없었던 그는 나라 잃은 서러움을 뼈저리게 깨닫고 구국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하였다. 1915년 음력 정월 보름날 그는 백상진‚ 정운일‚ 이시영‚ 남형우‚ 홍주일‚ 윤상태 등 30여 동지와 더불어 뜻한 바 있어 보름 명절의 축하연과 시회를 가장하고 대구 남산의 안일암(지금의 안지랭이)에서 비밀 결사 대한국권회복단을 조직하였다. 당시 만주에서 이상룡‚ 김대락‚ 이시영 형제 등이 군관학교(후일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이에 군자금이 시급하므로 단원 각자의 성금은 물론 각처에 산재한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여 만주로 보내기로 밀약하여‚ 그도 동지들과 같이 군자금의 필요성에 대한 격문 및 경고 장을 국내 각처 부호들에게 내도록 하여 만여원의 자금을 만주로 보내는데 성공하였다. 같은 해 7월 15일 그는 우재룡‚ 채기중 등 조직한 [광복단]과 [대한국권회복단] 및 장두환‚ 김한종‚ 김경태 등 300여 동지와 더불어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여 각도에 지부장을 두고 만주에도 사령관을 두어 군대식으로 편성하여 맹렬한 활동을 벌였다. 1916년 8월 그는 대구의 부호 서우순에게 군자금을 모집하려다 실패하여 정운일‚ 이시영 등 여러 동지와 함께 붙잡혀 대구 재판소에서 백여일의 예심을 마치고 1917년 4월 26일 이른바 살인예비죄‚ 총포화약취체령 위반으로 6월형의 선고를 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겪고 풀려 나왔는데 이 사건이 일명 대구의 권총사건이라 일컬었다. (판결기록) 1917년 11월 그는 정순영‚ 이정희‚ 홍주일등 동지와 더불어 매국노 변절자‚ 친일악질 관리들을 처단하기로 밀약하고‚ 구자금 모집을 방해하고 동포를 괴롭히는 친일 악질관리인 박용하를 죽였다. 같은해 2월 이를 이종국이란 자의 밀고로 동지들의 전모가 드러났다. 이에 많은 동지가 연루 및 혐의를 받고 공주 및 각 경찰서에 수감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이란 이유로 4개월만에 풀려 나왔다. 1919년 2월 그는 감시가 격심하므로 국내 활동은 불가능함을 깨닫고 만주로 건너가 이상룡‚ 김동삼‚ 박경종‚ 김형식 등 동지가 운영하는 부민단에서 독립운동의 기지를 마련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한편 4월 유하‚ 통화‚ 환인‚ 즙안 등 각현의 지도자들이 유하현 삼원포에 모여 부민단을 중심으로 만주 이주 동포들의 자치 기관인 한국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의 총본영으로 군 정부를 세웠다. 그때 그는 내무요원으로 활약하였고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군 정부는 많은 구자금이 또한 필요하였다. 그는 군자금 조달의 사명을 띄고 국내에 들어가 표면으로는 한약방을 경영하면서 신분을 가장하고 군자금은 물론 국내의 동향을 만주에 연락하며 활약을 계속했다. 그런데 동아일보 1921년 5월 23일자 4면 기사에 보면 그는 같은 해 5월 13일 오후 2시 합천해인사 구광루에다 합천‚ 초계‚ 고령‚ 대구‚ 현풍‚ 창녕‚ 진주‚ 곤양‚ 해인사 등지에서 800여명의 청년들을 모아놓고 [현대와 청년의 사상]이란 제목으로 시국연합대강연회를 개최했다는 기사가 생생하게 보도된 것만 보아도 그의 대담성과 생명을 내걸고 오로지 조국 광복만을 위해 싸워온 발자취를 엿 볼 수가 있다. 그러나 한스럽게도 1949년 3월 28일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6세였다. 그는 구국운동에 온 힘을 쏟다보니 혼기의 기회를 잃고 43세에 늦은 결혼을 하여 57세때 2대 독자의 아들을 낳았으니 이를 보아도 그의 애국 정신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의 구국투쟁을 정부에서 알고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을 받은바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