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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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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김하구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김하구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676년(숙종 2년) 상세설명 선생은 1676년(숙종 2년) 병진 12월 초하루에 영덕군 강구면 직천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바다가 바라보이는 황해도 수안현에 살았으며 고려 전리 판서위가 비조이며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선생의 6대조인 김 난서는 화양현감으로 계시면서 임진왜란 때 대구 파전재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러 선무이등공신이 되었고 고조 김흔도 역시 정유재란 때 창의군으로 창녕 화왕산성에 가서 곽 재우장군과 함께 큰 공을 세웠다. 선생의 아버지 휘는 세희고 호는 매창이라 하고 호조 참판이며 글을 잘 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선창 장씨 종한의 딸이며 증 정부인이었다. 12살 때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이때‚ 가례에 따라 상례를 어른과 같이 엄숙하고 예절 바르게 치루고‚ 부지런히 배워 동당시에 합격하고‚ 임오년 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기해년에 문관에 합격했다. 1723년(경종 3년 계모)에 보태학관이 되고 청암 도찰방이 되었고 영종 4년 호남에 반란이 일어나자 창의를 일으켜 여러 동지들과 함께 적을 치고 평정했으며 1765년(을유년)성균관 전적이 되고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경술년에 병조 좌랑겸 춘추관 기사가 되었다가 해남 현감이 되어 부임하여 그 곳 수재들을 뽑아 글을 가르치고 여씨향약을 본받아 미풍을 지키게 하고 부역과 세금제도를 고쳐 민폐를 없애니 그 곳 간사한 무리들과 아전들이 짜고 반정운동을 일으켜 그 책임을 지고 관직을 파해 고향 영덕에 귀양오게 되었다가 1년만에 풀렸다. 억울함을 당하여도 개의치 않고 벼슬길에 뜻이 없어 가래나무 밑에 집을 짓고 거문고를 벗삼고 집 이름은 추암 거문고 이름은 뇌룡이라 하고 스스로 즐기며 살았다. '입심이정'이란 가훈을 갖고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불평이 생기고 마음이 맑지 않으면 시가 생기지 않는다"하고 뜰앞에 매화와 대를 심고 일하는 모습은 모두 세밀하고‚ 약간의 술을 빈번이 기울이며 거문고 소리에 의지하면 신비로운 기운이 감돌아 하늘에서 학이 내려오는 것 같았고 또 즐거울 대는 들을 소요하면서 30여년을 이렇게 살다가 84세 때 나라에서 가선대부동지충추부사란 벼슬을 자손들의 부축으로 가서 받았다. 숙종 경진 7월 11일 87세로 세상을 떠나셨고 그해 10월 18일 구리골에 묘를 섰다. 참고문현 : 추암집‚ 영영승람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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